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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기독교 종북론의 뿌리

기사승인 2017.10.12  17: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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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단과 그 현재적 변용

일제시절 서북청년단의 역사적 태동

서북 지역(평안도 일대)은 조선시대 내내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곳이다. 19세기 말 그곳에서 성장한 신흥 상공인층과 지주들은 새 사회를 꿈꾸며 이른바 근대 자본주의문명의 첨병으로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수용했다. 이 지역 지식층은 평양단군으로 상징되는 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 파악하며 구한말과 일제 시기 기독교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공간에서 이들의 입장에서는 북한 체제의 토지개혁과 사유재산권 부정은 그들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었다. 해방 뒤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하다 월남한 사람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이유다. 일제시대부터 북한 서북지역의 기독교가 보인 반사회주의, 공산주의 성향, 자본친화적 속성, 친미주의 경향은 해방 후 일제부역자 청산을 앞세운 북한 공산당 정권에 저항한 서북지역 지주와 기독교 출신이 대거 남하하는 역사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하한 서북지역 청년들은 서북청년단을 조직해 해방 정국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들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에 목숨을 걸고 이른바 ‘좌익 척결’의 선봉에 섰다. 서북청년들의 죄악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46년 대구봉기(10월항쟁)와 1948~54년 제주 4·3항쟁의 학살이다. 사진은 당시 학살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자료사진)

해방 후 정국과 서북청년단

남하한 서북지역 청년들은 서북청년단을 조직해 해방 정국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들은 미국 기독교와의 연결고리를 이용해 이승만과 미국과의 관계에 개입해 이권을 챙겼다. 이승만은 미국과의 관계를 독점하려든 서북청년단을 경계했다. 이들은 특히 대학과 군 경찰 등에 대거 참여해 반공주의를 확산시켰으며, 특히 박정희가 교관으로 근무했던 육사 5기와 8기는 후에 군사쿠데타의 주력이 되었다.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기에 목숨을 걸고 이른바 ‘좌익 척결’의 선봉에 섰다. 미군정의 국립대학 설립안에 수많은 교수·학생이 반대운동을 벌이자 서북청년단은 그 핵심을 좌파라 단정 짓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6,000여 명의 회원을 경성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에 편입학시켰다. 경성방직·동양방직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파괴에 전위로 나선 것도 서북청년단이었다. 서북청년들의 죄악상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46년 대구봉기(10월항쟁)와 1948~54년 제주 4·3항쟁의 진압이다.

한국전쟁은 서북 개신교인들에게 기회의 공간으로 작용했다. 그 중심은 한경직이었다. 그는 남한 개신교 장로회에서 신사참배 거부그룹과 조선신학원그룹을 밀어내고 교권파로 주도권을 잡았다. 그 힘은 미국에서 들어오던 방대한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자금의 독점에 있었다. 서북 출신인 그는 전쟁 전 서북지역을 관할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밀착 관계를 활용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 통역을 전담할 수 있었던 덕이다. 이들 서북출신들은 대규모로 선교유학자금을 지원받아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한국사회와 기독교의 엘리트계층 주류로 기반을 마련한다.

서북청년단 중 주요인물은 한기총 초대회장이자 한국 개신교계의 존경받는 원로로 일컬어지는, 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1902~2000) 목사다.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북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했던 한경직을 중심으로 속속 결집했고, 영락교회는 월남자들의 신앙 공동체이자 반공의 전투기지로 구실했다. (자료사진)

이승만 정권과 서북청년단

이승만은 미국과의 관계를 독점하려든 서북청년단을 의심스럽게 보았으며 결국 해체하기에 이른다.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는 미군정 당시 조직된 대한민국의 극우 반공주의 청년 단체였다. 1946년 3월 5일 생성된 월남자들의 단체들이 그 해 11월 30일에 통합되어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서북청년회의 사무실은 한국민주당 본부가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 등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1947년부터 이들을 견제한 이승만은 지청천을 시켜 대동청년단을 창설함으로써 족청과 함께 서서히 대동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서북청년회원 중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민국 경찰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1948년의 남한 단정 반대사건인 제주도 4·3사건에 남로당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4·3 사건 진압과 학살에 가담하였다. 제주도에서 단정 반대인 4·3사건이 발생하고 김달삼 등 남로당원들이 개입하여 사태를 확산시키자, 서북청년단은 남로당 반대를 명분으로 4·3사건에 개입하였다.

한편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제주 시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했다. 이런 이승만의 명령을 실행한 것이 서북청년단이었다. (자료사진)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서북청년단의 간판을 사용하던 이들도 있었다. 한편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가 나오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조병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 1947년 3월 3·1절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 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은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 한 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한편 한민당·이승만으로부터도 후원을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최창학·박흥식 등 친일파의 경우에는 협박을 통해 자금을 얻어내기도 했다. 일부는 군으로도 들어왔다.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단 내부에서도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렬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년 12월 19일에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으며,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되었다

서북청년단은 육사 5-9기까지 대거 입학해 군의 형성에 참여했다. 그 중 5기와 8기는 교관이었던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등장해 이후 한국사회와 기독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주류 대형교회는 평양노회 등 서북출신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이들이 상당수이며, 이들이 한국사회 종북론의 핵심생산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과 서북청년단

이승만 정권기 한때 정치적으로 배제됐던 서북 출신들은 5·16쿠데타와 함께 화려하게 부활한다. 서북청년단 회원들은 한국전쟁기 조선경비대(국군)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에 대거 들어갔다. 47년 입교한 육사 5기생 중 서북 출신이 3분의 2였고, 48년 입교한 8기에도 서북 출신이 많았다. 5기와 8기의 서북 출신 장성들은 1961년 군사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서북청년단은 육사 5-9기까지 대거 입학해 군의 형성에 참여했고, 그 중 5기와 8기는 교관이었던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등장해 이후 한국사회와 기독교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주류 대형교회는 평양노회 등 서북출신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이들이 상당수이며, 이들이 한국사회 종북론의 핵심생산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북청년단 중 주요인물은 한기총 초대회장이자 한국 개신교계의 존경받는 원로로 일컬어지는, 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1902~2000) 목사다.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북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기도 했던 한경직을 중심으로 속속 결집했고, 영락교회는 월남자들의 신앙 공동체이자 반공의 전투기지로 구실했다. 영락교회 학생회·청년회가 서청(서북청년회)의 중심이었을 만큼 이 교회 자체가 서청 탄생에 깊이 연루돼 있다.

1960년대 서북청년단이 주축을 이룬 한경직의 영락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3부 예배를 드리는 1만 명 이상의 대형교회로 성장한다. 박정희는 군사독재정권의 정통성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이들을 적극 활용했으며 한경직과 월드비전, 한국선명회 등이 정권의 위기마다 미국을 방문해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정권의 종교세력 통제와 분열 지배정책에 따라 중앙정보부 등에 참여해 산업선교 등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주역이었다.

1980년대-90년대 한기총의 등장

1980년 광주항쟁 이후 한국 시민사회는 미국의 역할과 반공주의, 친미주의에 비판적 성찰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사회 내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시민사회도 성장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에 기반한 한국교회의 기독교세계관은 커다란 위협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위기감은 정권옹호적이고 극우적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1989년 6월 한 신문 기사는 흥미로운 유행어를 소개했다. “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그 기사는 저 말의 배경을 이렇게 썼다. “요직을 과점한 대구·경북 TK에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 원로그룹들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국회의장·국무총리·대통령 비서실장)임을 빗댄 것으로, 노스웨스트(북서=서북, 편집자 주)는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의 성장과 영향력 확대는 한국 사회를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소망교회란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소망교회는 서북 출신 목사 곽선희가 세웠다. 한국의 주류세력은 표면적으로 TK(대구경북)이지만 WN(서북출신)은 이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채 드러나지 않게 한국사회의 주류로서 자리 잡고 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위협을 느끼던 친미반공세력들, 특히 기독교 주류 세력은 노무현 정부 시절 ‘힘의 공백’을 스스로가 나서서 채우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들 세력에는 이전에 민주화 전력이 있던 서경석, 김진홍, 인명진 등까지 전향해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자 하였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세력은 친미반공으로 무장한 기독교 세력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요 논리이다. (자료사진)

2000년대 이후 뉴라이트와 기독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위협을 느끼던 친미반공세력들, 특히 기독교 주류 세력은 노무현 정부 시절 ‘힘의 공백’을 스스로가 나서서 채우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들 세력에는 이전에 민주화 전력이 있던 서경석, 김진홍, 인명진 등까지 전향해 현실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자 하였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세력은 친미반공으로 무장한 기독교 세력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주요 논리이다.

구국기도회와 종북론

이미 1990년대 이후 광장에 등장한 ‘구국기도회 세력’은 이전 민주화세력이 사용하던 구국기도회 형식을 적극적으로 전용하여 종북몰이에 나섰다. 이들 세력의 기반은 한국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은 서북 출신 대형교회이다. 에스더기도회, 흰돌산수양관, 한기총, 김한식과 한사랑선교회, 박성업, 김미홍, 홍가혜 등이 대표적인 단체와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단체들과 인물들이 거론된다.

특히 정보기관이나 국가기관의 고위직을 지낸 기독교 인사들이 표면적으로 대표인사 직함을 가지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중 박성업은 얼마 전 건전한 복음주의단체들과 인물들을 종북으로 몰아 소송에 휘말려 패소하기도 했다. 법원의 일관된 입장은 ‘종북몰이는 근거 없는 명예훼손이고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력은 정치적인 판단에서 계속 종북몰이에 노골적으로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부분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불거진 최태민과 최순실과의 관계이다. 박정희는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접근했다고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기독교 내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이미 알고 있던 최태민에게 대한구국선교단을 구성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의 관리 명목으로 박근혜를 보냈다는 것이다. 예장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를 불러 민주화운동을 하는 진보 기독교 세력이 강하다며, 이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태민 씨에게 보수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주문한 셈이다. 최태민 씨는 이에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하고 총재가 됐다. 또 같은 해 박근혜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이렇게 보면 오래된 박근혜와 최순실과의 정치적 관계,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의 활동 양태가 현재의 구국기도회 세력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던져주게 된다.

최태민은 원자경이라 불리운 큰 무당이었으나 예장종합총회라는 군소교단에서 5만 원을 주고 안수를 받고 기독교 내에서 활동을 개시한다. 최태민은 상당히 많은 돈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는 1974년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 충격 속에서 지내던 박근혜에게 1975년 2월경 위로하는 편지를 3차례 보내 박근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에 의하면 편지는 죽은 육영수가 최태민의 꿈에 나타나 ‘딸은 한국의 지도자, 더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며 자신은 그러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 ‘내 딸 근혜가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니 가서 그녀를 도우라’, ‘내(육영수)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최태민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후 편지를 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직접 만나기로 결정하게 되고, 실제로 1975년 3월에 직접 만나게 된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 당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육영수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하는 최태민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최태민은 육영수 피격 이전에 청와대를 드나들었으며 박정희는 기독교 내 독재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최태민에게 구국선교단 결성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사진)

다만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 측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2016년 11월 1일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이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한 말에 의하면,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 사망 이전부터 이미 박근혜에게 여러 번 접근했고 육영수는 그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인 최태민과 박근혜, 두 사람의 만남의 과정과 두 사람의 관계부터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다.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최태민은 육영수 피격 이전에 청와대를 드나들었으며 박정희는 기독교 내 독재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최태민에게 구국선교단 결성을 지시했고, 세간에 알려진 최태민의 육영수 현몽은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자각의 메시지를 박정희가 보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박근혜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중요한 일원으로 정치적으로 데뷔해 권력을 분점했으며, 이미 이 시기부터 ‘정치인 최순실’이 박근혜의 곁을 지켰다. 이들의 구국선교단은 기독교 내 주류세력들과 연합해 친미반공을 앞세운 정권안보의 첨병으로 교회를 활용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으며, 박근혜 정권이 위기에 빠지자 노골적으로 구국기도회를 주도하며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박삼종 평화의마을교회 담임목사 / 평화통일연대 운영위원

 

     [참고문헌]

  1. 류대영,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2. 윤혜원, 일본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III
  4.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5.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6. 강인철, 저항과 투항, HUP
  7. 강인철,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HUP
  8.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지식산업사
  9. 김당, 시크릿파일 국정원, 메디치
  10. 김수진, 한국장로교 총회창립 100년사 1912-2012, 홍성사
  11. 주종환, 뉴라이트의 실체 그리고 한나라당

 

박삼종 cogitu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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