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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과 박정희는 왜 싸늘한 침묵을 주고받았을까

기사승인 2017.12.05  03: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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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윤이상 평전> 저자 박선욱 시인, “동백림은 6·8 부정선거 은폐위한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

그날의 기록

1964년 10월 9일. 독일 쾨니스호프 호텔 만찬장에서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진다. 재독 한인회장 윤이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서독 대통령 하인리히 뤼프케를 옆에 두고 만찬 내내 싸늘한 침묵을 주고받은 것이다. 당시 윤이상은 서독과 유럽에서 주목받는 신예 작곡가였다. 박정희는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 중이었다.

그날의 연회는 뤼프케가 박정희를 위해 열어준 자리였다. 뤼프케는 극적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가난하고 척박한 극동의 음악유학생 윤이상은, 서독으로 건너온 뒤 승승장구하여 이제 거장의 반열에 진입하고 있었다. 국가 명운을 걸고 돈을 빌리러 이역만리 날아 온 박정희가 이 성공한 유학생을 만나 이산가족 상봉마냥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라. 하지만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윤. 이. 상. 그의 이름은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그는 금기였고, 이단이었다. 왜인가. 한반도에서 나고 자란 현대음악의 세계적인 거장을 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낮은 목소리’로 불러야만 했을까.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윤이상의 대표곡 <낙양>이 흘렀다. 박정희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건 뤼프케였다. 그는 가운데 앉은 박정희를 지나, 윤이상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낙양>에 관한 것이었다. 둘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박정희는 말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뤼프케는 곁눈질로 박정희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기대했을까. 박정희는 여전히 말이 없다.

반면 윤이상은 박정희의 침묵을 이해했다. 그도 싸늘한 침묵으로 응수했다. 애써 박정희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차라리 그 침묵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윤이상은 후에 <나와 박정희>란 책에서 이날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64년 박정희는 서독을 공식 방문하였다. 하루 저녁 서독 대통령 주최의 초청연이 성대히 베풀어졌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서독의 언론이나 사회 여론은 냉담했으나, 환영연의 광경으로 보아서는 서독 정부가 한국과 얼마나 장사하고 싶어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서독의 저명한 정계와 경제계 인사들은 대부분 모였다는 인상이었다. 뤼프케 대통령이 나를 좌중에 소개시켰다. 박 대통령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박과는 반대로 육영수 여사는 나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박을 사이에 두고 뤼프케 대통령하고만 얘기를 주고받았다. 뤼프케는 음악에 관해 넓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좀 전에 연주된 나의 곡에 관해 상당한 이해력으로 분석적인 의견을 펴놓았다. 그래서 약 45분 동안이나 나와의 대화가 중단됐다가도 계속되곤 하였다. 그동안 박은 한마디도 입 밖에 말을 내지 않았다.” 윤이상, <나와 박정희> 중.

윤이상과 박정희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1917년 동갑내기라는 것부터 시작해, 출신지도 각각 통영과 구미로 멀지 않다. 젊은 시절 윤이상이 세상에 발표한 첫 작품이 아이들을 위한 동요집이었다. 박정희는 군인이 되기 전 소학교 선생 일을 했다. 풍금을 잘 쳤고, 동요 몇 개를 직접 작곡까지 했다고 한다.

같은 나이, 동향, 소학교 교사, 음악을 좋아하는 기질까지 둘은 닮았다. 마음 맞는 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둘은 실제 원수만도 못한 사이였다. 윤이상은 박정희를 끔찍하리만치 싫어했다. 박정희에게 대통령이란 호칭을 달아 부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1967년 ‘동백림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윤이상을 고국에서 영원히 추방시킨 원흉이 되었다. 윤이상 일생의 고난은 박정희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문제의 그날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1964년 10월 8일 박정희는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에 방문했다. 그는 9일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장에서 재독 한인 회장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던 윤이상을 만난다. 뤼프케는 극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만찬 내내 싸늘한 침묵을 주고받는다. (자료사진)

“나는 뤼프케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그를 2미터 앞에 두고 관찰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의 얼굴에서 덕(德)이나 인(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둡고 강직하고 치밀하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형적인 인상까지 풍겼다. 나는 왜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박에게 이런 헛수고를 하였던가? 그때 나는 나에게 타일렀다. 국내에서야 어쨌든 외국에 나온 바에야 나는 박 개인을 위한 것보다 내 나라나 내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어느 하잘 것 없는 나라의 대통령 앞에서 최경례를 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윤이상, <나와 박정희> 중.

윤이상은 박정희의 첫인상을 박하게 평가한다. 경멸의 감정마저 느껴진다. 그는 박정희의 얼굴에서 덕이나 인은 찾아볼 수 없고, 범죄자의 인상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대통령이란 호칭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는지 ‘박’이라 칭할 뿐이다.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와 대담에서도 박정희를 향한 윤이상의 경멸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의 민중은, 특히 박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황제인 천황의 추종자였고 오카모또 미노루(박정희가 다까끼 마사오에 이어 두 번째로 개명한 일본 이름 – 필자 주)라는 이름으로 장교로서 일본군에 가담하여 한국과 싸웠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박과 같이 일본화 된 사람이 일본과 조약을 맺는다면, 그것은 일본에 대해 주체적이지 못할뿐더러 일본에는 이익이, 한국 민족에게는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 명백하다.” 루이제 린저, <상처 입은 용> 중.

박정희는 아마도 윤이상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의 눈에 윤이상은 국제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할 위험인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다 1963년 윤이상이 고향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갔다 나온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박정희 또한 윤이상의 방북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상징하는 윤이상과 박정희의 이날 만남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악연의 시작점? 종착점? 아니다. 1917년 동갑내기 윤이상과 박정희의 악연은 이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둘의 악연은 이보다 훨씬 더 미래에까지 이어진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입교 당시 모습. 윤이상은 박정희가 일본 황군에서 복무한 이력 때문에 그를 경멸했다. (자료사진)

둘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된 그날에 우리가 주목할 건 ‘싸늘한 침묵’이다. 둘은 그 침묵을 통해서 이미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 침묵은 윤이상과 박정희가 살아온 과거를 설명하는 침묵이었고, 동시에 미래를 암시하는 침묵이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과거,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미래.

<윤이상 평전> 저자 박선욱 시인으로부터 듣는 그날의 사건

서울 모처에서 박선욱 시인을 만난 건 그날의 침묵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윤이상 전문가다. 그 만큼 윤이상을 잘 아는 인물도 드물다. 올해 초 <윤이상 평전>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관련 강연을 다니느라 전국을 누비는 중이었다.

가볍게 만나 ‘그날의 일’을 들어보겠다고 한 인터뷰가 4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그는 자료한번 들춰보지 않고서도 윤이상의 일대기를 술술 풀어낼 만큼 윤이상이란 인물에 빠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1964년 10월 9일, 독일 쾨니스호프 호텔 만찬장에서 벌어진 괴이한 사건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이상의 삶을 이해해야만 했다. 윤이상의 삶을 모르고서, 45분 동안 벌어진 그날의 일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서울 모처에서 박선욱 시인을 만난 건 그날의 침묵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올해 초 <윤이상 평전>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관련 강연을 다니느라 전국을 누비는 중이었다. (출처 삼인 출판사)

- 얼핏 보기에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윤이상은 왜 박정희를 싫어했고, 박정희 역시 윤이상을 차갑게 대했는가.

윤이상은 박정희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윤이상은 박정희가 다까끼 마사오, 즉 일본 황군의 장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순 사건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소속의 좌익이었다. 자기 살자고 동료들을 다 불어서 숙청당하게 했다. 그런 사정을 아는 윤이상은 박정희란 인물을 싫어했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윤이상이 1963년 북한에 갔다 온 걸 알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어떤 곳인가. 윤이상의 신상을 박정희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만찬장에서 박정희가 윤이상에게 차디차게 대한 이유였다.

1964년 10월 9일 이 둘의 만남은 우리 역사의 아주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서독 대통령은 전혀 내막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면서 박정희에게 ‘당신 나라의 국민이 우리나라에 와서 이렇게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윤이상에게 만찬장 음악회 연주를 시킨 거다. 그리고 박정희를 사이에 두고 윤이상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갔다.

뤼프케의 계획은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박정희는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을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듣기만 했고 대꾸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박정희를 사이에 두고 서독 대통령과 윤이상 두 사람만 서로 즐겁고 화기애애하게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묘한 장면이 그날 연출된 것이다.

- 67년 ‘동백림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 이전이다. 윤이상이 박정희 싫어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달라. 어쨌든 차관을 빌리러 독일까지 날아 온 고국의 대통령이 아닌가.

많은 사람이 윤이상을 음악가로만 알고 있다. 사실 그렇게라도 알고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윤이상의 삶을 보면 다채롭다. 그는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윤이상의 과거행적을 알면 알수록 그가 박정희와 군부독재 세력에 왜 경멸의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윤이상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

박정희를 경멸한 이유는 그가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기 때문

청년시절의 윤이상. 박선욱 시인은 윤이상을 위대한 음악가이자, 독립 운동가, 전쟁고아들을 돌본 사회사업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나라와 이 땅을 사랑한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말한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 윤이상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달라.

윤이상의 독립운동 의식은 유년기 때부터 심어졌다. 윤이상이 자란 통영은 유난히 독립의지가 강한 지역이었다. 비밀 조직이 많았다. 독서회도 많았다. 총독부가 우리나라 역사공부 하는 것을 금지하니까, 어른들과 학생들이 어린이들을 시켜 금서를 전달하고 돌려보았다. 어린 윤이상도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총독부가 금지한 서적들을 전달한 아이들 중의 하나였다.

김상옥이라는 시조 시인이 있다. 이 사람도 항일운동을 해서 여러 번 교도소에 갔다 왔던 사람이다. 김상옥은 윤이상의 동네 3년 후배이다. 지금부터는 내 추측인데, 아마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서로 친구처럼 지내지 않았을까. 형 동생 하면서 말이다. 둘은 함께 어른들의 비밀조직에서 금서를 나르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통영이란 곳의 분위기가 그랬다.

윤이상이 13살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산기슭에서 돌 쪼는 소리가 들려 몰래 훔쳐보았다고 한다. 조선 사람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삼일운동 때 만세 운동을 하다가 칼에 맞아 죽거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의 비석을 훼손하는 장면을 본다. 일경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민족정신을 고조시키는 비문이 계속 남아있으면 항일운동이란 의욕이 활활 타오르게 될 게 빤하니까, 총독부가 조선인을 회유해 몰래 비문을 지우게 했던 거다.

어린 윤이상이 그걸 발견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인기척을 내니까, 그 사람이 얼른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일들이 여럿 건 있었다. 윤이상의 어린 시절은 그냥 평범한 어린아이라기보다는 항일의식이 들어가 있는, 잠재적인 항일투사의 모습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 된 윤이상은 직접 항일운동에 투신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1937년 화양학원(지금의 화양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목동의 노래>라고 하는 동요집을 발표했는데, 일부 비평가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어떤 비평가에게 냉소적인 평가를 받고 상처를 받는다. 잠시 음악을 손에서 놓고 무전여행을 떠난다. 그는 무전여행을 마친 다음 화양학원으로 돌아왔는데, 이케노우치 도모지로라고 하는 일본 음악가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연주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는다. 윤이상은 다시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의욕이 생겨,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윤이상 평전>의 저자 박선욱 시인. 그는 윤이상이 유학을 가기 전 독립운동을 했던 일, 전쟁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했던 일 등 일반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또 다른 모습들을 알려주었다. (이상범)

윤이상은 2년간 도모지로에게서 대위법과 작곡법을 배웠다. 1941년에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이 진주만 습격을 해서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의 폭격이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이때 윤이상은 동료들과 함께 무장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했다. 미국이 전쟁판에 뛰어들었으니까, 일본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연합군에 가담해서 무장투쟁을 하자는 취지로 비밀 조직을 만든 것이다. 실제로 무사시노 숲에서 항일운동을 위한 유격훈련을 남몰래 시작했다. 그러다가 윤이상은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임박한다는 첩보를 듣고 서둘러서 귀국을 했다.

통영에 돌아와서도 윤이상은 무장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무인도를 소유하고 있는 누군가가, 윤이상이 속한 비밀조직에 유격연습을 할 수 있도록 땅을 내주었다. 윤이상과 동료들은 무인도에서 유격훈련을 하면서 미국 단파방송을 듣고 시시때때로 전란의 보고를 들었다. ‘지금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으로 떠드는데, 실제로 라디오에서 들어보니까 일본이 계속 패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도 계속 유격연습을 열심히 해서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자’ 그런 분위기였다.

한번은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윤이상이 일본 순경에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다. 윤이상은 처음에는 항일무장운동 준비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해서 내심 불안해했다. 그런데 일본 순경이 갑자기 종이 뭉치를 딱 치켜드는 것이다. 윤이상의 악보였다. ‘이 나쁜 놈. 네가 조선어로 악보를 썼어? 대일본제국의 일본어로 써야지.’ 이렇게 호통을 치는 거였다. 윤이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윤이상은 그렇게 두 달 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일이 있었다.

- 윤이상이 고아원을 운영했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

통영 시절의 윤이상. 윤이상은 1950년 1월 30일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였던 이수자 여사와 결혼했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윤이상은 해방 정국에서 부산시립고아원 원장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어른들이 일본군에 끌려가거나 강제징용을 당해서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거기다 일본에 있던 한국의 전쟁고아들이 부산항구로 몰려들었다. 아무도 그 아이들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여력이 없었을 거다. 전쟁고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구걸을 하거나 구두를 닦거나 소매치기 하거나 등이었다. 책임감 강한 윤이상은 이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친구와 함께 고아들을 거두러 다녔다.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함께 가자며.

미군이 윤이상을 도와줬다. 부산시립고아원 원장이란 직함까지 붙여줬다. 여담이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윤이상은 부산 시청 직원으로부터 무고를 당했다. 미군이 준 위문품을 착복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은 없었다. 미군이 준 물건을 시장에 가져가서 식료품으로 바꾼 후, 아이들에게 계란을 주고 빵을 주고 밥을 해줬을 뿐이었다. 여하튼 그 사건으로 윤이상은 고아원 원장을 그만두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도 한몫했을 거다. 하루는 위문품으로 가득 찬 창고에서 홀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진짜 마음만 잘못 먹으면 착복을 하고 한 재산 남길 수 있겠구나.’ 윤이상 집안은 대대로 유교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유생이자 시인이었고, 윤이상 자신도 어릴 적부터 서당을 다녔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서도 그랬겠지만, 그런 생각에 미치자 윤이상은 고아원 원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음악에만 몰두했다.

윤이상은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동백림은 6·8 부정선거 은폐위한 독재정부의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이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재판받고 있는 윤이상(오른쪽)의 모습.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 세계적인 음악가, 항일운동가, 사회사업에 투신했던 휴머니스트,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투사의 모습까지. 윤이상이 남긴 족적이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그는 우리에게 생소한 존재였다. 김정숙 여사가 독일에 있는 윤이상의 무덤에 통영의 동백나무를 심으면서 비로소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단도직입 묻겠다. 아무래도 윤이상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인가? 그가 세간의 평대로 간첩이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금기어가 된 것인가?

윤이상은 빨갱이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유럽식 사회주의에 관해서는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만약 윤이상이 공산주의자였다면, 그의 성격상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윤이상은 항상 자기의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쩌면 북한에 가서 살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북한에 드나들었지만 가서 살지는 않고 한국의 민주화만을 바랐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공산주의자였다면 한국의 민주화를 이야기 했겠나. 맨날 욕이나 했겠지.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걸 자기인생의 가장 큰 꿈이자 목표로 삼았다. 그가 마흔 살에 쓴, ‘내 나이 20세가 되어서’란 수필이 있다. 유학을 떠나는 자기 자신을 20살이라고 가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적은 글이다. 그 글에는 윤이상이 유학을 가서 얼마동안에는 작곡을 몇 편을 하고, 교향곡을 몇 편을 쓰고, 한국에 와서는 몇 십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겠다는 등 그의 인생설계가 담겨있다. 자기 목표에 투철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산주의자였다면 그런 약속, 초기의 다짐과 관계없이 오히려 북으로 갔을 것이다.

재판받는 윤이상. 박선욱 시인은 동백림 사건이 군부독재가 6‧8 부정선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벌인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자료사진)

그러지 않겠나. 남한에서는 입국이 막혀있고, 북쪽에서는 환대해 주니까 아예 눌러 살고 싶지 않았을까. 서독에서 살면서 후학들을 길러내기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아예 북한에 눌러 살면서 서구에서 배웠던 것을 그곳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을 거다. 북한에서 윤이상의 위상은 대단하다. 김일성 주석은 살아생전 그를 ‘민족의 재간둥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표현을 직접 써 가며 높게 평가했다. 지금까지도 북한에서는 윤이상 음악제가 국가행사로 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은 북한에 들어가 살지 않았다.

윤이상은 산청에서 나고 통영에서 자랐지만 언제나 통영을 자기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윤이상이 1995년에 서거했으니까, 94년 12월 그 무렵이었을 거다. 윤이상이 일본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일본에서 죽기 싫다’고 해서 독일로 돌아가서 생을 마감했다. 윤이상은 독일로 돌아가기 바로 직전에 통통배를 어디서 하나 구해가지고는 일행들과 함께 통영 앞바다까지 와서, “저기가 내 고향이오. 내가 꿈에도 못 잊을 내 고향 통영이오”라며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고향을 사랑했고 고국에 돌아오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유학시절의 윤이상. 그는 40세에 유학을 떠나며,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 아무래도 67년 동백림 사건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윤이상이 우리 사회의 금기어가 된 이유는 동백림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윤이상은 간첩 혹은 빨갱이로 인식되었다. 시인의 말대로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면, 과연 동백림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조작된 것인가?

나는 당시 동백림 사건이 ‘대규모 간첩조작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이 6·8 부정선거 이후 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돌파구였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만든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당시에는 간첩조작 사건이 엄청나게 많았다. 실제로는 간첩이 아니었는데 무고하게 간첩으로 몰려서 죽거나 다치거나, 수십 년 동안 연좌제에 휩쓸려서 가족과 후손들이 알거지가 되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완전히 파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총통’을 만들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한마디로 암흑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김종필과 오히라 메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으로부터 사죄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고, 아주 적은 금액으로 경제적으로 무마시킨 굴욕적인 협상이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 재야학자, 지식인, 교수, 학생들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일어나서 시국선언을 하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10년형을 받는다. 국제사회의 대대적인 구명운동으로 2년 만에 가석방됐다. 곧바로 추방되었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다. 사진은 구속 당시의 모습.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설상가상으로 삼선개헌을 위한 대규모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6·8 부정선거가 그것이다. 윤이상은 67년 6월 17일 베를린에서 간첩혐의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당했다.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이 간첩으로 몰렸다. 6·8 부정선거가 일어난 지 열흘도 채 안 돼 발생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간첩 사건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긴 힘들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의 합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67년 동백림 사건은 대표적인 용두사미 사건으로 이해하면 쉽다.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죄목을 받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윤이상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받았지만 결국 2년 만에 가석방 된다. 194명을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최종적으로 간첩 판결 받은 사람은 0명이었다.

2006년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을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한 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그게 정답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윤이상이 북한을 방문한 것도 맞고, 일부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접촉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국가보안법에 저촉이 되는 것이지 간첩사건은 아니었다.

영원히 추방당한 거장 윤이상

전두환 초청에 “5‧18 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말해

- 윤이상은 동백림 사건으로 추방당한 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다.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나.

윤이상은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식에서 오페라 <심청>을 공연하게 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더욱더 확고하게 다지게 된다. 윤이상이 국제무대에서 현대 세계음악의 거장으로 추앙받게 되자, 그를 그토록 싫어하던 박정희 정권에서도 공연을 허락할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이 당시 윤이상도 귀국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내 조국 내 땅이니까. 그런데 그때 마침 김대중 암살 미수 사건이 터졌다. 윤이상은 갈등에 휩싸였다. 결국 일본으로 건너가 김대중을 암살하려고 한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일로 오페라 <심청>의 국내 공연은 결렬되었고, 그의 귀국 또한 무기한 연기되었다.

윤이상은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른쪽은 부인 이수자 여사의 모습. 윤이상은 오페라 <심청>의 국제적인 성공 후 박정희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았지만, 김대중 구명운동으로 인해 초청이 취소됐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전두환 정권에서도 윤이상을 초청했으나 이때는 윤이상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윤이상은 전두환을 박정희만큼이나 싫어했다. 5·18 사건이 컸다. 윤이상은 전두환 정부의 초청에 “5·18 영령들 앞에 참회를 하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라. 그러면 내가 간다”고 답했다. 윤이상의 기개가 참 대단하다. 서슬이 시퍼런 권력자 전두환이 자기를 초청했는데 “5·18 영령들에게 사죄하면 간다”고 당차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5·18 광주항쟁은 윤이상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윤이상은 평온한 일상 속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그 참혹한 광경을 마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잘 알려진 위르겐 힌츠페터가 죽음을 무릅쓰고 찍은 동영상을 독일 국민들은 여과 없이 다 봤다. 전 세계가 그 영상을 다 봤다.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도 비밀리에 그 영상을 많이 봤다. 그 참혹한 현장을! 눈물콧물 흘리면서!

서울에서는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있었다는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있었다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며 광주가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을 때, 전 세계인들을 그 영상을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봤다. 윤이상은 1980년 12월 30일 초안을 잡은 뒤 1981년 3월 2일 칸타타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곡 중 하나다.

김영삼 정부 때도 들어올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전향서가 문제였다. 반성문이라고 해도 좋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윤이상에게 다시는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식의 반성문을 요구했다. 그것만 쓰면 귀국도 허락하고 자유롭게 왕래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윤이상은 이때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자기의 신념을 배반할 수 없었다.

윤이상은 세계가 인정하는 작곡가

빨갱이 콤플렉스로 우리나라만 평가절하

- 음악가로서 윤이상은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인가. 세계적인 거장이라고 하는데, 과연 객관적인 평가인지 궁금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이란 정치적인 이슈 때문에 주목을 받아서 이 사람의 본래의 위치나 위상보다 더 과하게 평가받는 게 아닌가, 그런 의심을 한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윤이상이 세계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다름슈타트는 다양한 실험음악과 양식들이 시도되는 현대음악의 산실이었다.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그곳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으면서 윤이상의 이름은 국제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다름슈타트에서 조우한 청년 시절의 백남준(좌)과 윤이상. 윤이상은 1959년 다름슈타트를 통해 세계무대에 데뷔,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대단한 호평과 찬사를 받는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윤이상의 음악 이력에서 1966년은 매우 중요한 해다. 윤이상은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예악>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60년대에 작곡된 윤이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음 기법이 완벽하게 적용된 작품이기도 했다. 또한 서양인들에게는 낯선 도교적 세계관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예악>이 호평을 받으면서 윤이상은 아예 국제적인 거장으로 인식돼 버린다. 1966년도는 윤이상에게는 정말 매우 중요한, 윤이상의 음악이 폭죽처럼 터지는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작품으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 선정된 것만 봐도 유럽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윤이상에게 이미 그 몇 해 전에 뮌헨 올림픽 개막작을 위촉한다. 우리나라로 생각해보자. 이제 평창 올림픽이 열리는 데, 평창 올림픽 개막작을 기왕이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겠는가. 아니면 누구라도 좋으니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높일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상징적인 무대에 윤이상의 작품이 올랐던 것이다.

윤이상은 오페라 <심청>을 통해 전 세계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된다.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 옆에 조그마하게 붙어있는 한국이란 가난하고 척박한 나라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동양적인 음색들이 서양기법을 통해서 마구 쏟아져 나오니까, 경악할 수밖에. 이들은 한마디로 새로운 세계를 본 것이다.

윤이상의 위상은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을 당시 그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인사들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다. 세계 유수의 음악가들, 예컨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스트라빈스키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182명이나 되는 세계 문화의 저명인사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서독 정부는 심지어 대한민국 박정희 정부에게 5억 마르크에 달하는 차관을 끊겠다고 협박하면서까지 구명운동을 펼쳤다.

음악가로서 윤이상의 위상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만 그의 대단한 가치를 모를 뿐이다.

1972년 오페라 <심청>을 통해 윤이상의 국제적인 명성은 더욱 확고부동해졌다. <심청>은 뮌헨 올림픽 개막작으로 공연되었다. 사진은 <심청> 초연 후 축하연 모습. 왼쪽부터 다우메 올림픽 준비위원장, 윤이상, 심청을 맡은 수키스, 바이에른 주지사. (자료사진)

-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윤이상은 평가절하 돼 있는가.

윤이상이 우리나라에서만 평가절하 된 이유는 그가 간첩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5년도에 취재 차 통영에 간 적이 있었다. 5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남자에게 윤이상의 생가 위치를 물었다. 대뜸 돌아오는 말이 “왜 그 빨갱이 집을 찾아가려고 합니까?” 이러는 게 아닌가. 이어서 하는 말이 “내가 그 사람하고 친척인데 내가 얼마나 고초를 받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연좌제를 통해서 윤이상의 친척들도 많은 고초를 당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우리나라에는 연좌제라는 것이 최근까지도 보이지 않게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남북 간에 대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간첩이란 말은 대단히 무서운 말이다. 용공·좌경·빨갱이·좌빨 이렇게 한 번 낙인을 찍어놓으면 벗어나기가 힘들다. 또 60대·70대·80대 되는 어르신들이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가 있어서 무섭게 생각한다. 윤이상에게 좌경·용공·빨갱이·간첩 등 낙인을 찍어놓으니까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윤이상의 음악을 듣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의 이름조차 금기시 됐다.

나만 해도 80년대에 등단을 해 문인사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윤이상의 이름을 들었다. 문인들은 ‘낮은 목소리’로 윤이상을 이야기했다. 윤이상의 음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처럼 일반인들에게 인식됐다.

1972년 오페라 <심청>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자,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부는 윤이상을 초청하려고 했다. 그 다음에 전두환 정부에서도 윤이상을 초청하려고 했다. 윤이상을 그토록 미워했던 박정희조차도 그를 초청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정말 공산주의자, 빨갱이, 간첩이었다면 아무리 세계적인 음악가라 한들 그들이 윤이상을 초청했겠는가.

오페라 <심청>의 한 장면.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작품으로 오페라 <심청>이 공연되면서 윤이상의 국제적인 명성은 더욱 올라간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애국자 윤이상

- 이제야 1964년 10월 9일 윤이상과 박정희가 왜 서로에게 냉담했는지 알겠다. 생소하기만 했던 윤이상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조금은 그려진다. 오랜 시간 윤이상을 연구하고, 그의 흔적을 좇은 사람으로서 윤이상이란 인물에 대해 총평을 해 달라.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윤이상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윤이상은 독립 운동가였다. 윤이상은 전쟁고아들을 돌본 사회사업가였다. 윤이상은 통영 문화 협회에 들어가서 한글보호 운동을 했던 문화지킴이였다. 윤이상은 우리나라 동요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동요 작곡가였다. 윤이상은 기개가 남달랐고, 불의에 굽힐 줄 몰랐고, 책임감이 강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반도를 사랑한 ‘애국자’였다.

윤이상은 1969년 추방된 이후 영영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살아생전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땅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겠다고. 윤이상은 단 한 번도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된 두 개의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똑같이 내 동포‧내 핏줄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같이 자기가 갖고 있는 음악적 지식과 열정을 부여하고 싶어 했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그를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윤이상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주장과 오해가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윤이상의 진짜 모습이 있다.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그의 진짜 모습이. 어떨 때는 뚜렷하게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여전히 희미한 채로 남아있다. 50년 간 금기어였던 이름 윤. 이. 상. 그는 동갑내기 박정희와 함께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인터뷰 낙수]

윤이상의 곡은 난해하고 생소하다. 박선욱 시인에게 윤이상의 곡 중 몇 개만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이상이란 인물을 이해하는 최종단계는 아무래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으로 끝날 듯 했다. 사실 박선욱 시인과의 인터뷰는 이보다 길고 다방면에 걸쳐 이뤄졌다. <윤이상 평전> 전체를, 둘이 앉아 훑어보는 기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나눈 대화 전문을 공개할 생각이다.

윤이상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주장과 오해가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윤이상의 진짜 모습이 있다.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그의 진짜 모습이. 어떨 때는 뚜렷하게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여전히 희미한 채로 남아있다. 1964년 10월 9일, 박정희와 있었던 그날의 일을 추적하다가 다시 원점에 선 기분이다. 한참 윤이상을 이야기했는데 가슴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50년 간 금기어였던 이름 윤. 이. 상. 그는 동갑내기 박정희와 함께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있다.

윤이상은 생전에 현대음악의 세계 5대 거장으로 손꼽혔으며, 위대한 작곡가 30인에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진은 그가 공연에 앞서 연주자들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박선욱 시인이 추천하는 윤이상의 명곡들

가장 먼저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들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윤이상이 음악으로 쓴 자화상이다. 윤이상 음악의 분수령이 된 작품인데, 대 오케스트라 편성에 첼로가 없고 독주자 한 사람만 첼로를 연주한다.

오케스트라는 자기(첼로)를 억누르는 세계로 묘사된다. 첼로는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라음, 즉 A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힘으로 덮쳐누르는 오케스트라 때문에 결국 그 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솔#음, 즉 G#음에 간신히 이른다.

인간의 유한성과 독재 권력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서 인간 윤이상은 쓰러지고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쓰러지고 굴복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윤이상의 정신은 저 높은 곳, 즉 라 음을 끝없이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천상의 세계로 상징되는 라 음을 오보에가 연주를 하고, 뒤이어 트럼펫이 라 음을 연주하면서 음악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나는 뛰어난 첼리스트 고봉인과 니콜라스 알트슈테트가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인간의 대지를 억누르는 파도가 아무리 끝없이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되고 꿋꿋이 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진정으로 그러할 때 천상의 음악은 나의 내부로부터 샘솟듯이 올라오는 것이라고.

5·18 광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한 윤이상의 모습. 윤이상은 광주항쟁의 참상을 목도한 후 <광주여 영원히!>란 칸타타를 작곡했다. 전두환 정권의 그를 초청하자 “5·18 영령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출처 윤이상평화재단)

칸타타 <광주여 영원히!>도 빼놓을 수 없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무슨 음악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광주여 영원히!>를 들을 때마다 5‧18 당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다.

첫 장면이 궐기와 함성이다. 계엄군들이 광주 시민들을 향해서 무자비하게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고, 대검으로 난자하면서 억누르고 지쳐 들어온다. 그 순간이 타악기를 통해서 연주된다. 타악기 군이 어마어마하게 파도치고 몰려오는 장면이 지나면 어느 순간 아주 고요한 대목이 나온다. 진혼의 대목이다.

계엄군이 물러가자, 광주 시민들은 수많은 시신을 수습하여 도청 상무관 앞에 모였다. 그들은 억울한 주검들을 관에다 넣은 후, 태극기로 덮어서 분향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고생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시민들에게 국화꽃을 나눠주었다.

진혼의 대목이 끝나자 활기찬 멜로디가 뒤를 잇는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고 하는 대동세상의 모습이 그 속에 투영된 게 아닌가 싶다.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에는 5‧18의 비명과 함성, 숭고한 희생과 밝은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예악>은 윤이상 음악입문에 좋은 작품이다. 처음에 박을 탁 치면서 시작하는데 우리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장면이다. 윤이상의 음악을 많이 듣다보면 낯설고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윤이상이 마치 내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편안하고 친숙하게 들린다. 그래서 윤이상의 음악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한번 들어보시라고 꼭 권하고 싶다.

* 박선욱 시인은 누구?

82년 등단했다. 전두환 독재군부가 모든 언론을 찍어 누르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선배 문인들을 통해 윤이상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세계적인 음악가인데 동백림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이상에게 관심을 가졌다. 일찍이 청소년 평전 <윤이상 :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과 어린이 평전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를 펴냈다. 2017년 <윤이상 평전>을 내기에 이르렀다.

박선욱 시인. 82년 등단했다. 선배 문인들을 통해 윤이상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세계적인 음악가인데 동백림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이상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상범)

1959년 전남 나주 출생. 1982년『실천문학』에 시「누이야」 외 3편이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보는 벗들』, 『세상의 출구』 등이 있고, 창작동화집 『모나리자 누나와 하모니카』, 청소년 평전『채광석: 사랑은 어느 구비에서』와 『윤이상: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어린이 인물 이야기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 『행복한 이티 할아버지: 두밀리 자연학교 교장 채규철 이야기』, 『황병기: 천년의 숨결을 가야금에 담다』,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김득신』,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백동수』,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백석』 등도 출간했다. 1982년 제1회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민혁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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