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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원의 사명使命,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기사승인 2017.09.09  01: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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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형의 만남] 하나의코리아 대표 고형원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저도 어느 새 그 길을 걷고 있네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 이 땅 고쳐주소서 /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고형원이 작사, 작곡한 노래 ‘부흥’의 가사 일부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황무한 한반도의 회복과 열방의 부흥을 갈구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는 이 노래 외에도 ‘물이 바다 덮음같이’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마라나타’ 등 한국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많은 곡을 선보였다. 그런 고형원에게 어떤 타이틀을 붙여야 할까. 그는 찬양사역자면서, 예수전도단 간사이고, 문화선교를 위해 정식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이며, 하나의코리아(unitedkorea.org)라는 단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수많은 직함은 사역을 위한 기능적인 것으로 자신은 ‘형제’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다.

고형원은 찬양사역자면서, 예수전도단 간사이고, 문화선교를 위해 정식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이며, 하나의코리아(unitedkorea.org)라는 단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에게 어떤 타이틀을 붙여야 할까.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수많은 직함은 사역을 위한 기능적인 것으로 자신은 ‘형제’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다. (고형원 제공)

지난 7월 말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내 기록문화연구소 사무실에서 고형원을 만났다. 하나의 코리아를 염원하는 그는 수년 전부터 북한 가까운 파주에 살고 있다. 고형원의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부흥’과 ‘부흥2000’은 비공식적으로 50만 장 이상 팔렸다. 기독교 음반 시장이 일반 시장의 7분의 1에서 10분의 1정도의 규모라고 볼 때 엄청난 수치다. 분명 이 시대의 탁월한 찬양사역자임이 분명하지만 고형원을 단지 찬양사역자의 범주에만 가두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노래라는 도구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부흥을 염원하고, 한반도의 통일을 희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더 크고,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고형원과 진지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난 심정적으로 고형원이 너무나 친숙했다. 나 또한 그의 노래를 좋아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그의 사역을 잘 알고 있어서다. 내 뇌리 속엔 ‘고형원은 진짜’라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찬양사역자인 박종호씨가 일전에 내게 고형원에 대해 한 말 때문이었다. “찬양사역자로서 전 누구보다도 많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부러울 것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앞에만 서면 전 한없이 작아집니다. 저랑 동갑인 고형원입니다. 고형원은 세상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역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고형원은 진짜입니다. 진짜. 그래서 그 앞에선 어떠한 자랑도 할 수 없습니다.” 박종호씨의 말이었다.

사무실에서 가까이 접한 고형원은 진실이 묻어나는 얼굴을 지녔다. 말도 빠르지 않고 차분했다. 진지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던지는 ‘아재 개그’도 감칠맛 났다. 여러 직함이 있지만 하나의코리아 대표이기에 고형원 대표로 부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시 부흥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국의 대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 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 분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부흥을 노래한 고 대표는 부흥을 “개인적이건 민족적이건 자기 사명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명을 따라 살기 전에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사명을 따라 살기 전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 대표의 많은 말 가운데 가슴에 팍 와 닿았던 구절이다.

가까이에서 본 고형원은 진실이 묻어나는 얼굴을 지녔다. 말도 빠르지 않고 차분했다. 진지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던지는 ‘아재 개그’도 감칠맛 났다. (유코리아뉴스)

고 대표에게 빼놓을 수 없는 명제 가운데 하나가 북한과 통일, 하나의 코리아다. 북한의 영혼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그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이었다. 잃어버린 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고 대표에게 찾아왔다.

그는 일찍부터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 이룰 유일한 성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것뿐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자신의 야망과 영광이 아닌, 인생의 유일한 청중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이 땅에서 남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자기 정체성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북한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자 그는 순종했다. 북한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그 땅을 밟았으며 북향민들을 위로했다.

2000년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통일 코리아’라는 이름의 기도회를 갖고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북한을 향한, 하나된 코리아를 위한 새 노래를 생각나게 했다. 그의 음악적 경험과 재능이 하나님의 영감과 버무려져 여러 앨범이 나왔다. 지난해 6월에는 ‘하나의 코리아-더 아름다운 세계(United Korea 4 The World)’를 내놓았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음반이다. 고 대표의 인도 하에 유명 가수와 편곡자, 연주자, 음향엔지니어 등 200여명이 4년 6개월 동안 만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낸 모든 앨범에는 ‘한반도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열방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소망’이 담겼다고 했다. 열방으로 나가기 위해선 먼저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하나의 코리아’ 음반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하나의 코리아를 위한 그의 노력은 진행형이다. 조만간 하나의 코리아라는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 계획이다. 남과 북의 사랑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겠다고 한다. 고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난 그가 ‘복음의 운동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길 가는 복음의 운동가. 고려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던 그는 별다른 계기가 없었다면 다른 동기생들과 마찬가지로 학교를 졸업했을 터이고, 많은 건축물들을 설계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적절한 부도 축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란 믿음의 대상을 만난 이후,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자가 되었고 그 노래를 통해 차곡차곡 자기 나름의 건축을 하고 있었다. 사랑과 평화, 통일, 부흥, 연합의 건축 말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했고 영광스런 길이었다. 그의 말대로 ‘주님께 드린 것만이 유일하게 남는 것’이라면 그는 정말로 수지맞은 장사를 한 셈이다. 앞으로 그가 쓸 ‘복음의 건축학 개론’이 더욱 기대가 된다. 그와의 이야기를 문답형식으로 담는다.

고형원은 고려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허리통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예수전도단에 들어가 간사로서 예배인도자가 되었다. 1997년에 ‘부흥’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수많은 곡을 작사, 작곡했다. 2016년 6월엔 ‘하나의 코리아’ 음반을 발표했다. (고형원 제공)

가장 좋아하는 호칭은 ‘형제’

대학 중퇴 후 하나님 부르심 받고 찬양사역자 돼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이하 이) : 고형원 하면 ‘부흥’이 떠오릅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로 시작되는 부흥 말입니다. 간단히 약력을 살펴보면 1962년생으로 서울공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허리통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예수전도단에 들어가 간사로서 예배인도자가 되었지요. 1987년에 예수전도단 전임 간사로 헌신했습니다. 이후 10년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예수전도단 간사로 섬기면서 신학대학교(Northwest Bible College)도 수료했습니다.

1997년에 ‘부흥’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수많은 곡을 작사, 작곡했습니다. 2016년 6월엔 ‘하나의 코리아’ 음반을 발표했지요. 고형원 형제, 고형원 간사, 고형원 선교사, 고형원 하나의코리아 대표 등 수식어가 여러 개 붙을 수 있는데 뭐라고 불리길 원하십니까? 고형원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말해 주시지요.

고형원 하나의코리아 대표 (이하 고) : 저는 형제라는 호칭이 좋습니다. 제가 속한 예수전도단에서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하나의 코리아’ 음반을 내면서 일반인에게도 전해야 했기 때문에 편의상 대표란 직함을 가진 것입니다. 전 35살에 첫 음반을 내면서 ‘내 평생에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에 예수전도단에서 노래를 하고 찬양을 인도했지만 명확한 사명감을 갖고 한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맡겨진 일이기에 성실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35살 때 작곡과 예배사역을 통해 평생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저의 최우선적인 부르심이라는 자각을 했습니다. 50살이 넘어서부터는 북녘 땅의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음악적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감사가 제 마음 깊은 곳에 있습니다.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든, 일반 가요든, 어떤 노래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노래들을 평생 쓰고, 부르고 싶습니다. 굳이 저 자신을 말하라면 ‘춤추는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자’라고나 할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니까요. 저는 ‘멘트만 날려서 30년을 살아남은 예배자’이기에 아무래도 노래로는 좀 안될 것 같고….(웃음) 춤을 배우고 싶어요. 춤추며 하나님께 기쁨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과거 예수전도단에서는 몸이 좀 좋지 않아 느린 곡을 부르고 깊은 예배만을 드렸는데 이제는 기쁘게 춤추고 싶어요. 하하하.

이)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과 영광, 춤추는 예배자라는 단어가 인상 깊습니다. 어느 작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 분이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은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주 강력하게 다가온 말인데 지금 고 대표께서 하신 말씀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예수전도단 간사로 헌신한 이유와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시지요.

고) 고등학교 다닐 때, 교회에 예수전도단 간사님이 계셔서 예수전도단의 화요 모임에 줄곧 참석했습니다. 그때 많은 도전을 받았고 대학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학내 예수전도단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찬양 인도를 했었지만 대학교 2학년 때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그저 ‘착한 고형원’으로 여겼지만 그들의 생각과 다른 제 모습을 저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예수전도단의 제자훈련학교(DTS)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6개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에는 DTS 과정을 밟으면 간사로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과정을 밟고, 군대 가기 전 6개월 정도 간사로 섬겼습니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직접 악보를 그리는 사역도 했습니다. 건축학도로서 제도를 할 줄 아니까 송북(찬양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갔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던 저는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건축가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선교단체 간사 등 다른 무언가를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엔 해외의 바이블칼리지에 가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로 접었습니다.

그러다 기도하는 중에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이야기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게 이렇게 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형원아, 네가 평생 나를 위해 살기 원한다면 나를 의지해라. 너의 모든 필요를 내가 제공해 줄 것임을 믿고 네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거라.” 주님의 길을 따라야겠다는 확신이 왔습니다. 군대서 2년 반 있는 동안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전임 사역자로 부르셨다는 확증을 갖고 제대를 하게 됩니다.

1986년부터 파트타임으로 사역하다 이듬해부턴 전임 사역자로 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서 5년간 풀타임으로 사역하다 캐나다로 넘어갔습니다. 캐나다에서도 5년 정도 예수전도단의 전임 간사로 일했고 이후 5년 정도는 신학교를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예수전도단 찬양팀을 인도했습니다.

이) 허리통증이 심해 대학을 중퇴했다고 들었습니다.

고) 그렇습니다. 제대 후 복학을 했습니다. 당시 대학 축제 기간 동안에 선교 동아리들이 캠퍼스에서 예수 행진을 하면서 기도하는 행사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6~7개의 예수 행진 행사를 섬겼었는데 마지막으로 고대에서의 행사를 마쳤을 때엔 허리 통증이 극심해졌습니다. 의사는 제가 5~6개월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건축과에선 설계 작품을 해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학업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예수전도단 공동체로 들어가서 아픈 몸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점차 통증이 완화됐지만 캐나다에 가서도 3일에 한 번은 약을 먹어야 잘 수 있을 정도로 증세가 오래 지속됐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고통의 시절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리 통증이 없었다면 건축과를 마쳤을 것이고, 그러면 제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당시 함께 활동했던 예수전도단 사람들은 저를 만나면 “허리 어때”라고 묻습니다.

이) 고 대표께서 대학에 입학한 당시 캠퍼스 내에 CCC, IVF, 네비게이토 등 많은 선교 동아리들이 있었는데 굳이 예수전도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8년부터 명동에서 매주 열린 예수전도단 화요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제가 출석하던 교회 사람들이 모두 다 참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주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물론 일반 선교단체에서도 그런 모임이 거의 없었습니다. 찬양 운동을 펼쳤던 ‘경배와 찬양’도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매번 1000명에서 2000명이 모여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대학에 들어와서 고민 없이 예수전도단에 들어간 것이지요. 이후 시간이 지나 제가 그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평생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임재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60살까지는 찬양 인도를 하고 싶습니다.

이)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적은 없는데도 수많은 주옥같은 곡을 만들었습니다. 음악에는 일찍부터 관심과 재능이 있었는지요?

고) 감수성이 예민할 때 노래를 많이 듣기는 했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은 없었습니다. 예수전도단에 들어와서 처음 맡은 일이 악보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외국 악보를 따라 그리는 것이었는데 자연스레 번역도 함께 해야 했습니다. 당시 ‘예수 우리 왕이여’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원 보이스’ 등을 번역했습니다. 찬양 인도를 부탁받아 기타도 대학 들어가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부탁받은 이 두 가지 일을 계속하게 된 것이 저로 하여금 작곡을 할 수 있는 토양이 됐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훈련시키신 것 같습니다. 지금도 피아노도 못치고 기타도 아주 재능 있게 다루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음악과는 상관없었던 제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요.

고형원은 허리 통증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찬양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였다고 말한다. (유코리아뉴스)

“사명 따라 살기 전까지는 진정한 삶 아냐”

50만장 넘게 팔린 ‘부흥’, ‘부흥 2000’

이) 1992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해서 현지의 뜨거운 영적 분위기를 보고 고 대표는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한민족의 사명의 촛대를 옮기지 말아 달라”고 뜨겁게 기도했지요. 그 기도 속에 만들어진 노래가 1997년 예수전도단에서 낸 첫 앨범 ‘부흥-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에 실린 ‘비전’과 ‘부흥’이었습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강당에서의 집회를 시작으로 전국 순회 집회를 통해 예수전도단의 음악과 영성이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고요. 특별히 ‘부흥’을 타이틀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 1992년에 DTS의 스태프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습니다. 이슬람권인 인도네시아에 강력한 예배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첫날 갔던 인도네시아 교회에서 수백 명의 성도들이 1시간이 넘도록 모두 함께 일어나서 찬양하며 기쁨 충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방문한 교회마다 뜨거운 임재의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역하러 갔다가 사역을 당했다고나 할까요. 그 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뜨거운 신앙을 지녔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뭔가 영적으로 나눠줄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들이 우리를 깨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 도중에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장로님께서 성찬 잔을 들고 6~7분간 울면서 감사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그런 장면을 처음 봤습니다. 그때 저에게서 다급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우리 한민족을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민족으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부디 그 사명과 부르심의 촛대를 옮기지 말아주세요.” 아무 생각 없이 황급히 나온 기도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인도네시아 교회를 축복해 열방을 위한 선교 국가로 사용해 주소서”라고 기도했겠지만요. 인도네시아를 선교지로 알고 왔는데 일반 기독교 가정에서도 방언 찬양을 하며 뜨거운 예배를 드리는 모습과 청년들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한민족의 사명을 생각하며 그 기도를 드리게 됐던 것입니다. 이후 4~5년 동안 그 기도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노래가 ‘부흥’과 ‘비전’이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들판에서 거닐 면서도 그 기도를 드렸기에 부흥 음반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음반에 ‘부흥’이라는 이름은 제가 붙인 것이 아닙니다. 캐나다에 있던 저는 단지 ‘우리 민족의 사명’ 정도로 음반 타이틀을 붙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전도단 한국 대표였던 홍성건 목사님께서 “지금 한국에 ‘부흥’이란 노래가 급속히 퍼지고 있으니 부흥을 타이틀로 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래서 홍 목사님의 제안을 따랐습니다.

이) 부흥이란 단어는 20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전후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크게 회자됐는데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고) 개인적이건 민족적이건 자기 사명이 회복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예수 믿고 그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속해주신 이유가 저마다 있습니다.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집회에서 청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명을 따라 살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너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부르심을 알았고 그 부르심, 즉 사명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다. 오직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만 성경에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자기 부르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크리스천들에게 사명의 회복이야말로 너무나 중요한 과제입니다.

부흥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양적인 운동이 아닙니다. 몇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자기 길을 알고 가는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흥 2000’ 앨범은 당대 최고의 CCM 뮤지션들이 총 출동한 기념비적인 앨범이었습니다. 판매량도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고) 저는 음반 판매에 따른 수입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든 수입을 드렸습니다. 제가 비록 판매 수입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지만 집회 등에서 음반 판매량에 대해 과장되게 말하면 안 되기에 예수전도단 출판부 측에 판매량에 대해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판매를 주도한 예수전도단 출판부에서는 ‘부흥’과 ‘부흥2000’ 앨범이 50만장 넘게 나갔다고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100만장 정도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기독교 음반 시장이 일반 시장의 7분의 1에서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많이 팔린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앨범이 그렇게 크게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고) 먼저는 한국 최고의 CCM 가수들이 연합으로 음반 작업을 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곡을 쓰고 다른 친구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연스레 연합사역이 됐습니다. 당시엔 연합으로 사역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자신들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음반을 듣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원합니다.”

또 하나는 음반에 들어 있는 메시지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과 관련해서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뮤직뿐 아니라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메시지가 있어야 컨템퍼러리 크리스천 미니스트리가 일어난다고 확대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희 이전에도 아주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의 노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지적인 측면에서 과거에는 개인적 간증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흥’과 ‘부흥 2000’ 앨범에는 개인의 간증보다는 좀 더 큰 그림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부흥, 민족, 통일, 북한 등 주제가 이전과는 좀 달랐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셨다고 봅니다.

이태형 소장(왼쪽)과 고형원 대표. ‘부흥’과 ‘부흥2000’ 앨범은 50만장이 넘게 판매되었다. CCM으로서는 다시 넘기 힘든 기록이다. 고형원은 수입을 모두 내놨다면서 그 모든 성공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했다. (유코리아뉴스)

북한을 품는 노래가 많은 이유

북한 땅과 동포들에 대한 마음 주신 하나님

5년에 걸친 프로젝트, ‘하나의코리아’

이) 고 대표께서 작사, 작곡한 노래 가운데 북한을 품는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품게 되었나요?

고) 1998년 ‘부흥 2000’ 투어를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북한을 위한 노래가 들어간 새로운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을 여러 번 주셨습니다. 98년 6월 어느 날 성경 이사야서 35장 3절과 4절 말씀을 읽을 때, ‘강한 용사’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전에도 읽었던 말씀인데 마치 처음 보는 말씀 같았습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원하시리라”는 그 말씀이 레마(문자화된 성경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오는 것)로 강하게 임했습니다.

당시 해외에 있던 저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북한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오셔서 당신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도 되는지 이성적으론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레마로 그 말씀을 제게 주신 것은 확실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다시 보았습니다. 그 순간 생전 처음 ‘하나님께서 지금 내 입에 새 노래를 부어주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과 함께 멜로디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온 노래가 ‘강한 용사’라는 곡입니다. 제 노래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멋있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북한을 위한 노래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 후 5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새로운 곡을 부어주셨습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부흥 2000’ ‘우리 함께 기뻐해’ 등이 그 시절에 나왔습니다. 운전하다가도 멜로디를 흥얼거리다보면 ‘이거는 어떤 노래며, 어디서 불러야 할 노래’라는 영감이 떠오른 거지요. 인도네시아에서의 경험이 있은 후 5년 동안 주신 노래는 ‘부흥’ 음반에 다 들어갔습니다. ‘북한에 관한 노래가 들어간 새로운 앨범’을 내야 한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확인한 뒤에는 새 노래를 만들고 싶은 소원이 커져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셔서 많은 곡을 부어주셨습니다. 곡이 너무 많아 ‘부흥 2000’은 2개의 CD로 만들게 되었지요.

이) 고 대표는 그때를 계기로 화려한 조명을 뒤로하고 묵묵히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예배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지요. 영국 웨일즈에서 열린 ‘열방 부흥 축제’에도 계속 참석했고요. 당시 사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과 전환이 이뤄졌을 것 같은데,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고) 제가 뭘 알겠습니까. 예수전도단에서 참된 예배와 말씀 묵상을 배우고 선교와 사역을 하게 됐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런 훈련 과정이 있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계속 찾아 나가려 했습니다.

이후 ‘부흥한국’이라는 팀을 만들어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부흥한국은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 끝까지’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 슬로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깨닫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사야 40장 1절을 묵상하다가 “너희는 북녘에 있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이 레마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의도해서 북한에 관한 음반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음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음반 제작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영적 체험들을 하게 됐습니다. 평양과 개성을 방문하면서 그 땅 안에서 주신 노래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거나 음반을 만들 때마다 계속 북한 땅과 동포들에 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에 이끌려서 정신없이 따라온 것이지요.

고형원의 곡 중에는 유독 북한을 품는 노래가 많다. 그는 자신이 의도해서 만든 게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북한을 향한 마음을 주셨고, 자신은 그 뜻에 순종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유코리아뉴스)

이)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 맞아요.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고 걸음을 이끌어주시는 거지요.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제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부흥 앨범을 만든 것부터 각종 콘서트나 집회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것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의 첫 집회 후에 평가회를 하는데 참가한 사역자 중 한 분이 “앞으로 10년은 계속 이런 집회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 연주자들이 과거 집회와는 뭔가 다른 어떤 것을 느낀 것이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북한에 대한 마음을 터치한 것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부흥 2000’ 앨범에 담긴 하덕규 목사님의 ‘그날’이라는 노래는 제가 북한을 위해 처음 쓴 곡입니다. 그 곡을 만들 즈음에 전 세계 3만 여명이 북한을 위해 금식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전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생각하고 교육받았던 북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북한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의 질문에 하나님이 주신 답이 있습니다. “형원아, 저 북녘 땅에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나의 큰 슬픔이었다. 유약하고 일이 잘 안 풀리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남한으로부터 점점 잊혀져가는 저들은 정말 오랜 나의 슬픔이었단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그런 마음이 들다보니 하나님의 슬픔이 제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감동이 시시때때로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당신이 부르는 노래가 당신의 미래다. 노래가 길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과 곡을 주셔서 멜로디를 다듬고 만드는 중에 그 노래의 정신과 가사를 제가 품게 됩니다. 하나님은 제게 특별히 북한이나 세계 선교,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노래를 주셨습니다. 그 곡을 만들고 부르다 보니까 저도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 혹 홀로 운전할 때 등 각 상황 속에서 먼저 마음을 주셨고 부족하지만 제가 그것을 붙들 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셨던 것 같아요. 특히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한 것들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시잖아요.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 때문에 저도 지금의 자리에 와 있게 된 거지요.

이) 그 노래 때문에 우리도 만나게 되었죠. 새 노래란 말이 와 닿습니다. 지금은 새 노래, 새 소리, 새 것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입니다. 고 대표는 노래하며 수없이 열방을 다니게 됐지요? 어릴 적 꿈이 시인과 외교관이라고 했는데 세상의 외교관은 아니지만 하늘의 대사로 세계를 다니며 그 나라를 전하고 계시니 꿈이 이뤄진 것이네요?

고) 그렇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게 됐습니다. 시집은 내지 않았지만 노랫말을 쓰니 시인도 됐다고 볼 수 있죠. 노래를 부르다보면 “가사도 당신이 썼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제 얼굴이 그런 가사를 쓰지 않게 생겼나 봐요. 하하하.

이) 하나의코리아(unitedkorea.org) 음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이 음반 제작을 위해 하덕규 박종호 송정미 소향 부활 전인권 인순이 안치환 송소희 등 유명가수 28명, 편곡자 22명, 연주자 127명, 음향엔지니어 22명 등 200여명이 4년 6개월 동안 수고했지요. 이런 힘든 작업을 시작한 이유와 ‘하나의 코리아’라는 명제를 던지고 나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 5년 쯤 전에 제게 절망감이 찾아왔습니다. 사역을 위해 교회를 방문해 집회를 하다보면 선교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임재 등에 대해선 너무나 뜨겁게 반응하지만 북한에 대한 부분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북한을 용서하고,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전체 청중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한 대형 교회에서 3번 연속 집회를 했는데 동일한 지점에서 똑같은 벽을 느꼈었습니다. 그때, ‘이거 정말 오래 걸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모든 차이점을 극복하고 북한을 품고 통일을 향한 대로를 열면 사람들은 “역시 기독교는 희생하며 민족을 생각하는 종교구나. 개인의 성공이나 야망의 덫에 갇힌 이기적인 종교가 아니구나”라며 돌아올 텐데 오히려 교회가 길을 막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선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리겠다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연변 과기대 20주년 행사 때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중학교 교정의 윤동주 시비에서 서시를 보았습니다. 그 서시를 읽는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구절이 제 마음에 확 와 닿았습니다. 또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보면서 ‘하나님, 북한의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시구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명을 따라 걸어가는 세상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서시를 앞에 두고 기도했습니다. 서시를 노래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신자건 비신자건, 모두 함께 부를 메시지가 될 것 같았습니다.

윤동주는 민족 시인이면서 기독교 정신을 지닌 시인이었기에 거기엔 자연스레 기독교 사상이 들어가 있었을 테고요. 연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멜로디가 나왔습니다. 그때, 제 마음 안에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요가 떠올랐습니다. 이후 4년 반 정도 곡을 썼습니다. 마지막 1년 동안 녹음했습니다. 참 힘든 작업이었고 재정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과연 일반 기획사나 가수가 응답할까’라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론 참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통일 시대를 겪을 것이기에, 사전에 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앨범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발매된 하나의 코리아 앨범. 5년 여에 걸친 긴 프로젝트 끝에 탄생했다. 전인권, 박완규, 인순이, 소향, 신영옥, 하덕규, 송정미, 박종호 등 국내 유명 CCM가수와 대중가수들이 참여했다. (하나의 코리아 제공)

“교회들,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내용들 가르쳐”

“선한 일을 미움과 증오, 배제 등 악의 자원으로 해선 안 돼”

“어떤 경우에도 북한 주민 도와야”

이) 지금 시대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처에서 연합이 외쳐지고 있는데 정작 한민족간의 연합은 요원해 보입니다. 더욱 더 간극이 벌어지고 있으며 언제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종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습니다.

남북이 하나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북의 하나됨은 단지 정치적이고 국제·외교적인 명제입니까? 거대한 흐름 가운데 개인의 노력이 참으로 보잘 것 없어 보기이도 합니다. 남한 내에서도 서로간의 생각도 많이 다르고요. 이러할 때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고) 우리가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통일비전캠프를 열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단체들이 연합해서 공동 주관하고 있습니다. 매주 북한을 위한 기도회를 하다 보니 많은 강사분이 오셨습니다. 그들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한반도 통일은 민족 간·국제 간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영적으로 모든 사안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2년 전 통일비전캠프에서 들었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분단된 우리나라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굽어지는 죄가 쌓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과거 쓰라린 기억과 전쟁의 상처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달되지 않고 굽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방법이 있잖아요. 예수님은 어떤 주제에 대해 가르치실 때, “너희가 이전에는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면서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을 보세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의 교회들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굶어 죽는 북한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그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반응에 저희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피 흘리고 있을 때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서 가서 사랑을 행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일부에서는 그렇게 만든 강도를 잡기 전까지는 절대 그를 돕지 않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정말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분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미움과 증오, 배제 등 악의 자원을 갖고 하려 합니다. 공산주의 자체도 견고한 진이지만 미움과 증오의 장벽이야말로 더 견고한 진일 수 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들어가야 밝아지는데 그 빛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견고한 진이 지금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승리하셨고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 영혼들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어떤 경우에도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북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느냐를 갖고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를 갖고 심판하십니다.

북한의 수많은 영혼들이 복음 한번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은 북한의 사상 체제와 지도자 때문이지만 과연 우리는 죄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아 그들이 죽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악의 문제를 그저 “저 사람들 때문이야”라면서 수수방관할 수 있습니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고 대표는 뜻을 세운 이후로 한 길 가는 사역자로 살았습니다. 그 한 길을 갈 수 있었던 동력은 분명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고 대표에게 하나님이란 누구십니까?

고) 그 분은 제가 영원히 알아가야 하고, 알고 싶은 분입니다. 그 분은 편애가 없으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죄인들의 친구이십니다. 그 모습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지극히 영광스런 모습처럼 보입니다. 힘 있고 가진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 저와 같은 죄인들의 하나님이란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그 분이 저의 아버지란 사실에 늘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다보면 감격스럽습니다.

이) 고 대표에게 성공이란?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 사명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이 땅의 유일한 성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목회건, 선교건, 비즈니스건, 이 땅의 각 영역의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을 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야망과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루려 한다면 우리 모두 하늘의 성공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좇는 것만이 유일한 성공입니다.

이) 훗날 사람들이 고형원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고) ‘하나님을 노래하는 자’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이) 앞으로의 계획은?

고) ‘하나의 코리아’를 뮤지컬로 만들어 남과 북의 사랑과 평화 이야기를 담고 싶습니다. 동북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을 위한 곡을 만들기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요.

(끝)

진행 :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 정리 : 김태현 기록문화연구소 연구원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 소장. (유코리아뉴스)

* 이태형은 누구?

전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더 있다』, 『두려운 영광』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이태형 justin105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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