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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피카소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

기사승인 2017.09.18  12: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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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배우의 사진이 낯 뜨겁다. 좌파인사로 낙인찍힌 두 배우의 평판을 무너트리기 위해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에서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나님이 주신 좌우 양팔로 기껏 좌우 손가락질 하는 편 나누기에 급급하다니. 애시 당초 한쪽 팔만 있었으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본다. 비너스와 니케의 양팔 없음이 좌우 편 가르지 말라는 것이었을 수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도 두 배우처럼 평생 딱지를 붙이고 살았다. 별명도 많다. “피카소는 천재다. 그림은 난센스다. 미치광이다. 좌파 공산주의자다. 호색한이다. 휴머니스트다. 무정부주의자다.” 이 중에서도 ‘좌파’라는 딱지 때문에 그는 백수를 가까이 살면서 행복한 날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피카소’는 금기어였다. ‘피카소’라는 이름을 상표, 광고, 상호 등에 사용하는 행위는 단속대상이었다. 피카소의 미술을 가르치는 것도 금지였고, 미술 도구의 상호로도 쓰지 못하게 했다. 크레용 이름, 다방 이름을 ‘피카소’라고 지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미국에서 피카소는 평생 입국자 금지 명단에 올라있었다. 그는 좌파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미국에 가보지 못했다. 지금 뉴욕 매장에 피카소의 작품이 등장하지 않으면 경매가 열리지 않을 정도인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20세기 미술사에서 피카소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다.

파리에서 방문한 피카소 미술관 입구. (김종원)

얼마 전 파리에 갈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피카소 미술관(Museu Picasso)을 찾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건물이다. 둘러만 봐도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한 마디로 피카소 ‘스럽다.’ 피카소의 젊은 날 <자화상>은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닮았다. 예리하면서도 절제된 품위가 느껴진다.

피카소의 절친 <카사게마스의 죽음> 앞에서는 한참 머물러야 했다. 스페인에서 파리로 함께 유학 온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으로 파리의 한 카페에서 권총자살을 하자 피카소는 충격에 빠진다. 그 친구의 마지막을 그려 놓았다. 붓 터치가 거칠고 투박한 게 격정의 마음이 느껴진다. 피카소의 다른 작품에서는 흔하지 않은 기법이다. 오히려 고흐의 작품과 닮았다. 짙푸른 색은 죽음이 지나간 후, 찾아오는 상실감과 우울함이 뒤섞인 항변의 빛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깊은 고뇌를 짐작해 본다.

피카소, 자화상, 1900
피카소, 카사게마스의 죽음, 1901

벌거벗은 형이 어린 동생을 엎고 있는 <두 형제>를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어릴 적 우리는 저러고 살았다. 살구 색과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순한 구도인데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르네상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거치면서 시작된 원근법, 입체적 사실성이 자리를 굳힌 20세기에 갑자기 등장한 피카소는 그동안 축척된 모든 이론을 잔인할 정도로 뭉개버린다. 어떤 화가도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그것이다. 선과 면, 세모와 네모로 분해시켜 버린다. 한 대상에 대한 여러 시선은 피카소가 본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피카소, 두 형제, 1906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

피카소도 한 때 유럽의 급진적인 지식인들처럼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나중에는 탈퇴하고 예술에 전념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때 그가 무정부주의자였다고도 한다.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좌우 진영의 힐난이다. 나는 그때가 휴머니스트였다고 본다. 피카소는 모든 종류의 독재에 반대하고 나선다. 화가의 눈으로 <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등 인류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의 학살과 전쟁을 목도한다. 그리고 전쟁을 증오했다. “나는 죽음에 맞선 생명의 편이고 전쟁에 맞선 평화의 편”이라고 선언한다. 전쟁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들은 명작으로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음 아프게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이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1950년에 발생한 ‘신천학살’ 소식을 듣고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유럽은 경악했다. 피카소는 그 뉴스를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 한국에서의 대량 학살, 1951

아무런 저항의 무기를 소유하지 못한 여인들은 공포에 질려 얼굴이 일그러져 있거나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우는 아이를 꼭 안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은 여인의 품속으로 달려든다. 이런 상황조차 파악되지 않은 듯 더 갓난아기는 흙장난을 하고 있다.

전쟁은 싸워야 하는 남자들에게도 잔혹한 일이지만 힘없는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는 더 비참한 일이다. 전쟁을 합리화하는 마지막 순서가 딱지 붙이기이다. ‘좌파’, ‘빨갱이’ 한마디면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는다. 때로는 살인조차도 쉽게 자행한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 같은 내 모습을 합리화할 수 있다. 무서운 무기이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을 때는 전시회 일정 때문에 <한국에서의 학살>은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피카소 박물관 창문이 유독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창을 내는 이유는 ‘그리워서’란다. 좌파도 우파도 모두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이 땅에서 전쟁뉴스가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핵무기니 전술핵이니 등등 필요 없는 말에 현혹 될 것 없다. 평화를 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피카소 미술관의 창문들은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창을 내는 이유는 ‘그리워서’란다. 좌파도 우파도 모두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김종원)

김종원 목사

청파동 효창교회 담임목사이다.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여러 지면을 통해 관련 글을 기고한다.

김종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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