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32: 24~32
한국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중단되었지만, 3년 동안의 전쟁은 한반도에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일상은 무너졌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생사도 모른 채 흩어졌습니다.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인명피해가 남쪽 군인과 민간인이 200만 명, 북쪽 군인과 민간인이 330만 명, 중공군은 36만 명, 그리고 미군도 14만 명 정도입니다. 모두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갔고, 살아있어도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이 가족과 고향을 떠나 그리움과 외로움 속에서 눈물 지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브루스커밍스는 그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머리말에서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의 끝인)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 그들 생의 남은 것들을 주워 모으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수도 서울에서는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북쪽에서는 현대식 건물이라고는 거의 다 쑥대밭이 되었다. 평양 등의 도시들은 벽돌과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마을들은 텅 비었으며 거대한 댐들은 더 이상 물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이 남과 북의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남은 것이라고는 무너진 가정과 산업시설, 그리고 서로간의 증오뿐이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조선그리스도교련맹(KCF)이 2008년 평양 봉수교회에서 공동예배를 드렸습니다. 남쪽 기독교인 100명 정도가 서울에서부터 북쪽의 전세기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 시내까지 남쪽 기독교인들을 안내하는 직원은 버스 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평양을 융단폭격 했습니다. 당시 평양 인구가 40만 명이었는데 미군 폭격기는 40만 톤 이상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습니다.” 지금도 북쪽 주민들의 머릿속에는 ‘미국=기독교=원수’라는 도식이 강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1인당 1톤씩 투하된 폭탄에 온 몸이 찢겨 죽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쟁은 끔찍합니다. 숱한 생명이 희생되고, 서로를 원수로 만듭니다. 도대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역사에 정의로운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지닌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전쟁은 결코 인간적일 수가 없고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죽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며, 내가 살려면 상대방 누군가는 죽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구조적으로 악이며,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기독교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불의입니다.
워싱턴 DC 국립묘지에는 한국전쟁 참전자들의 동상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이것을 볼 때마다 가슴속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수십 만 미국의 청년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에 와서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한복판에서 혹독한 추위와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쓰러지고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희생에 감사와 안타까움을 전합니다. 또 전쟁은 노근리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실수든 고의든 죄 없는 양민들도 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모순과 아픔은 인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파생된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육순종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CBS 화면 캡처 |
우리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은 유난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신의를 배신하기도 하고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늘날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성공이 지상목표였던 그는 실제로 성공하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절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극적인 삶의 전환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야곱이란 캐릭터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하면서도, 신앙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야곱은 매우 지혜롭고 영악한 사람입니다. 반면 그와 경쟁하며 인생의 패권을 다툴 에서는 거칠고 우직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져 내려온 신앙의 계보는 장자인 에서로 연결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야곱이 믿음의 계보를 잇게 됩니다.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한 해명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가족과 고향을 떠나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크게 성공합니다. 4명의 아내로부터 11명의 아들을 낳았고 외삼촌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재산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자신의 지략과 노력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라반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에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형 에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에게는 훈련된 400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인생은 때로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납니다. 내용은 달라도 살면서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만납니다. 그래서 야곱 이야기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오늘까지 전승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야곱은 이 위기를 멋지게 극복하고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됩니다. 형과 화해를 통해 온 가족의 생명을 유지했고, 평생 모은 자산을 지켰으며, 12지파의 창시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의 실제적인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인생역전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야곱이 승리하게 되는 터닝 포인트는 얍복 나루였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먼저 고향 쪽으로 향하게 한 후 얍복 강가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 밤이 지나면, 오래 전 헤어진 형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형을 만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형의 분노가 그의 삶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습니다. 형 에서와의 만남이 화해일지, 전쟁일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밤에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합니다. ‘얍복’은 히브리어 동사 ‘바카크’(בקק)에서 파생된 것으로 ‘졸졸 소리 흐르는 소리를 내다’ 또는 ‘잔을 비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명을 결정짓는 결전의 자리임과 동시에 자신을 비우는 거룩한 장소인 것입니다. 여기 씨름의 대상은 천사라기보다 사실은 하나님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에게 씨름을 걸어온 사람을 형이 보낸 자객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야곱으로선 질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20년을 고생해서 이룬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 씨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립니다. 모든 것을 걸고 결사적으로 매달립니다.
야곱은 이 씨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흔히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해석되는 이 이름의 뜻은, ‘이스라엘’의 ‘엘’(하나님)을 호격으로 풀이하여 ‘하나님이 이기시다’ ‘하나님이 다스리다’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의 맥락에 적합합니다. 실제 씨름 막판에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천사에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은 장소를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야곱은 그 날 목숨을 건 씨름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20년 만에 형제가 만나는 장면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형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고, 형제는 서로 입 맞추고 웁니다. 형 에서를 만나는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나이다.” (창 33:10)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얍복 나루의 결전을 통해 야곱이 변화되었고, 에서의 마음도 녹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만난 형은 예전의 형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만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목숨을 건 씨름을 통해 평화의 하나님을 만났고, 그 평화의 하나님으로 인해 형제화해의 대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야곱은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인 얍복 나루에서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려고 결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결사적으로 매달려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평화입니다. 전쟁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70년 전의 비극적인 전쟁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극한 대립으로 살아왔던 지난 냉전시대의 상황을 반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온 세월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전쟁은 곧 파멸입니다. 70년 동안 우리가 이룬 것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7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발달한 무기체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희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결코 안 됩니다. 이 전쟁을 막으려면 우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평화를 주시라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라고 결사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기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평화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매달림과 기도를 통해 평화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엉덩이 관절이 부러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 우리의 욕망이 무너지고, 우리 안의 증오가 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브니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서로를 사랑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습니다. 평화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치열했던 전쟁,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세계 냉전체제가 맞부딪힌 전쟁이고, 동족상잔의 전쟁이어서 매우 비극적인 전쟁입니다. 그래서 평화로 가는 길도 험난합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의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남‧북 당사자들은 물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NCCK는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기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께 평화를 내려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모든 것을 걸고 씨름했듯이,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고통 가운데도 포기하지 않았던 야곱의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평화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남북이 서로를 끌어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남북만이 아니라 한반도 둘러싼 미중일러와 전 세계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평화를 이루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쟁 끝난 지 67년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아직 정전 상태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전쟁이 끝났지만 법적으로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반도 불안의 근본 요인입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이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남북이 전 세계와 더불어 선언해야 합니다. 종전선언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종전선언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평화조약을 맺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조약은 양쪽 당사자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택해야 하는 법적 근거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NCCK는 2013년 부산총회 이전부터 한반도의 평화조약 체결 운동을 꾸준히 펼쳐왔습니다. 그동안도 전 세계의 교회들이 동참해주었지만, 더욱 깊은 관심으로 종전선언과 평화조약 체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얍복 나루의 야곱처럼 온 힘을 다해 기도함으로 ‘브니엘’의 체험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하나님을 만나므로 서로를 신뢰와 사랑으로 바라보고, 서로를 보듬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한반도에 임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는 남‧북‧미의 정상이 만나 대화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2년 전 4.27 남북 정상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평화조약과 평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당사자들이 무조건 다시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고 진심을 나누며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신뢰회복과 평화의 길이 활짝 열리리라 믿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2020년, 평화를 향한 역사의 큰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함으로 전쟁의 상처는 치유되고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며,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룬 화해와 평화가 한반도 위에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설교문은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예배 설교에서 했던 육순종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의 설교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6월 15일부터 25일까지 민족화해주간을 맞아 전국 교회에 보낸 것을 독자들을 위해 공유합니다. -편집자 주
육순종 ukoreanew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