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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국주의와 몰락

기사승인 2024.08.10  21: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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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 과정은 서구 열강들로부터 자국을 지키려는 노력과 더불어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자 하는 염원으로 점철됐다. 국내 정치적으로는 봉건제 산물인 번(藩) 제도 개혁과 천황을 내세운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 맞물렸다. 700년 막부시대가 가고 조슈번과 사쓰마번 주도의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의 영향을 받으며 빠르게 제국주의에 합류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침탈로부터 아시아를 지킨다는 기만적 명목하에 식민지 쟁탈전에 가담했다. 세계대전에 참가하면서 전쟁 국가로 자리잡은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 욕구를 억누르지 못했고 참혹한 수탈의 역사를 기록하다가 패망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도쿠가와 막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할 수 있었던 계기는 1858년 미・일통상수호조약이었다. 이들은 막부가 천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며 반발했다. 또한 1863~4년에 발생한 프랑스와 미국 상선 포격을 빌미로 연합함대가 구성되어 일본 침략계획을 본격화하자 조슈번 출신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 유학 중 급히 귀국한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 발전상을 목도한 이토는 ‘양이(攘夷)’를 멈추자며 협상 창구역(役)을 자청했다. 이토는 이를 막부 공격의 기회로 삼았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벌인 포격 책임을 막부에 돌리면서 배상금을 막부가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들에게 근대국가의 창설자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메이지유신 파는 1868년 ‘천황을 옹립하여 세상을 개혁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천황 군으로 막부 군을 타도, 쇼군이 거주하던 에도성을 접수했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 국가 예산 1%가량의 거금을 투자해서 서구 열강 12개국을 탐방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타개한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를 방문하여, 미국의 철도 기관과 영국의 제철소는 물론 기관차・군함 공장 등을 시찰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철도와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철도망과 기관차, 군함 등 군국주의 발전의 기초산업을 부흥시켰다.

1889년에 발표된 ‘대일본제국헌법’은 천황이 중심인 일본 특색의 입헌군주제 모습을 그렸다. ‘천황은 신성하며 불가침하다’고 천황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는데 근대국가의 정신에는 부합하지 못했다. 일본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구심이 될 수 있지만, 근대국가의 발전 방향인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제는 아시아 국가들 내에서도 보편적 가치를 추동하지 못했다. 의원내각제와 의회제도를 확립하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던 이토는 5대, 7대, 10대 총리로 활약했고 제1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기까지 일본제국의 영화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일본제국주의 팽창의 토대가 된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그리고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은 요시다의 옥중저서인 ‘유수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 기본 내용은 일본을 서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사력을 갖추고 북과 남으로 정벌에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 천황 아래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은 천황 패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시다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는 미국 방문 당시 “국내 개혁을 단행하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라며 일명 ‘일장기 연설’을 발표했다. 서구 발전상을 답습하겠다고 진보적 개혁의 포부를 밝혔던 것이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전격적으로 근대화에 몰입했는데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제국은 전쟁 국가로서 브레이크 없는 가속 페달만을 밟게 됐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출발하기는 했지만, 역사가 증거하는 바와 같이, 아시아 국가들을 보호한다는 팽창 명분은 기만에 불과했다. 난징 대학살과 한반도 강점에서 보였던 일본의 모습은 제국주의 수탈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토대가 천황제 패권 실현을 위한 국력 신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기세 좋게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지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패망으로 길로 접어들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자신의 제국주의 침탈역사는 부인하는 한편, ‘피폭국가’라는 피해의식으로 패전의 트라우마를 가리고 있다.

일본의 우익은 여전히 요시다 쇼인의 정신세계에 갇혀 있다. 2022년 피습으로 사망한 아베 전 총리는 조슈번 출신인데 요시다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군국주의 그 이상의 가치를 생성하고 전파할 수 없다면, 일본이 장차 부흥을 꿈꾼다 한들 국제적으로나 미래적으로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국제정세가 미・소 패권 다툼에서 미・중 패권 다툼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일본은 자기 성찰의 계기를 번번이 놓쳤다. 세계대전 패전 이후 과거를 철저하게 반성한 후 유럽의 지도국으로 거듭난 독일과 대비된다. 광복 79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은 온전히 탈식민화했는지 우리도 과거를 더욱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윤은주/ 북한학 박사, (사)뉴코리아 상임대표

윤은주 ejwarrior@hanmail.net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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