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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남북을 이을 제2, 제3의 이관우를 기다리며

기사승인 2017.09.12  17: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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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고기사] 이관우 전 CCC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 모금국장

“잠든 그대 이 비탈에 산새들과 살으려는가

때때로 일어나 엷은 안개 속에 헛웃음 웃고,

맘 내키면 양수리 맑은 물 따라

아침놀로 반짝이며 흐르려는가.

 

긴 겨울 얼음 위에 꺾이지 않고 버티고,

어찌하리 어둠의 한끝에 비명도 없이

떠나간 이.

 

잠든 그대 하늘을 가리운 상수리나무 칡넝쿨 아래

몸 부려 차라리 영원의 꿈을 꾸려 하는가.

넋이라도 거침없이 날개짓 하며

그대 홀로 남과 북을 오가려는가.”

 

고 이관우 목사의 장례식은 ‘통일선교 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젊음을 바쳤던 CCC, 그가 연합하고자 했던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를 비롯한 통일선교 단체들의 뜻을 담은 것이다. 남북을 하나로 잇고자 했던, 아니 그의 기도와 신앙 속엔 남북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오롯이 하나였던 그 짧지만 묵직했던 발자취 때문일 것이다. (유코리아뉴스)

양성우 시인의 시집 <그대의 하늘길>에 나오는 ‘양수리’란 시. 강화도 언덕빼기에 위치한 고 이관우 목사의 묘원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이 시가 떠오른다.

묘원 정면에서 약간 오른편엔 이제는 폐쇄돼버린 개성공단이 자리한다. 왼편으로 눈을 돌려 임진강 저 너머를 바라보면 연안군, 그리고 그 뒤로 사리원, 그 둘 사이에 평안북도 봉산군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끼고 자리한다. 고인이 생전 수십 차례나 방문했던 은정리 CCC 젖염소목장이 있는 곳이다. 남한강, 북한강이 합쳐지는 양수리처럼 남북의 강이 만나는 임진강을 바라다보며 아마 고인은 지금도 남북을 오가고 있을 것이다.

지난 7월 1일, 이곳에 고인의 유골을 묻으며 부인 정종미 사모는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4년 전 고인에게 간암이 발병했을 때 맡은 사역들을 다 내려놓길 바라고 호소했건만 고인은 “이대로 사역하다 가고 싶다. 보내 달라”고 부탁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노라고.

평생의 다짐 ‘북한 선교’

도대체 그의 소명, 그의 헌신이 어떤 것이었기에 병마마저도, 사랑하는 이의 간곡한 부탁마저도 막지 못했던 걸까. 고인은 1982년 조선대 기계설계과에 입학해 그 해 CCC 여름수련회에서 북한선교에 헌신한다. ‘해외 선교’보다 ‘북한 선교’에 더 마음이 갔다는 게 생전 그의 고백이다. 1995년 합동신학교 졸업앨범엔 “앞으로 10년 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에 가서 일하겠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 바람과 헌신대로 그는 순천지구 책임간사를 거쳐 서울 북동지구 책임간사, 그리고 1999년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 모금국장에 이르게 된다.

마침내 2001년 10월 젖염소 100마리와 함께 남포행 배에 오른다. 그리고 그 다음 달 기술 협의를 위해 베이징발 방북 비행기에 오른다. 2001년 11월 16일 그가 고려항공 기내에서 썼던 글엔 그때의 감격이 그대로 전해진다.

“민족의 한을 넘는다. 북녘의 하늘을 나른다. 새가 되어 학이 되어 또 다른 피조세계인 북녘의 하늘을 난다.”

그 한 해 전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긴 했지만 남북 간 불신과 의심은 여전하던 상황이다. 방북 때의 비장한 심정을 고인은 이렇게 피력했었다.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젖염소) 인도 요원으로 함께 갔던 간사 가족 중에 경찰이 있는데, ‘가면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후손들을 생각하며 민족을 짊어지고 가는 심정도 들더군요.”

그때부터 시작된 방북은 2007년 말까지 35회가 이어졌고, 남북관계 경색으로 마지막 방북이 이던 2011년 12월까지 총 50여 차례에 이른다. 그 방북길엔 통일이라는 감격만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훤칠한 키와 덩치에 비해 그는 건강하지 못했다. 방북 뒤엔 으레 온몸이 쑤시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얼굴은 까맣게 타들어가 며칠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긴장과 스트레스, 누적된 피로 탓에 간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2011년부터 그와 함께 사역했던 이영희 간사(CCC 통일연구소 실장)는 고인을 ‘지독한’ 헌신의 사람으로 기억한다.

“(방북을 위해) 열흘 정도 중국에 갔다 오면 그 다음날 바로 출근을 하셨어요. 휴식이나 안식년은 한 번도 갖는 걸 못 봤어요. 그걸 자랑삼아 말씀하셨고요. 사람들을 포용하고 열심인 것은 좋은데 자기 자신은 너무 돌보지 않은 분이죠. 2013년 간암 발병 전과 발병 후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북한 어린이들과 함께. 고 이관우 목사. (자료사진)

‘지독한’ 헌신

그는 생전 ‘방북’ 대신 ‘심방’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이것은 필자가 직접 들은 것이기도 하다. 젖염소 때문에 만난 것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 주민들을 목회의 대상으로, 때론 형이요 오빠, 때론 동료로 서슴없이 대했던 것이다. 1년에 평균 대여섯 차례, 고향에 가는 것보다 훨씬 자주 방북을 하고 북녘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런 표현도 무리는 아닐성싶다. 그리고 방북할 때면 그들이 터놓는 고충, 고민, 불평을 고스란히 들어줬다. 그야말로 ‘심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방북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이 선생님(고 이관우 목사)이 아니었으면 젖염소운동은 진작 중단되었을 것”이라는 북한 사람들의 말을 전해준다. 김윤희 박사(서울바이블칼리지 교수)는 2006년 5월 ‘은정CCC 염소목장’ 준공식을 위해 고인과 함께 방북했었다. 그때의 일화에 대해 김 박사는 “북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목사 선생, 기도하시라요’라고 할 정도로 이 목사님과 북한 사람들은 친한 사이였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니까 북한 사람들이 ‘안수기도 하면 된다’고 할 정도로 이 목사님을 잘 알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목사가 맺어놓은 끈끈한 관계들이 숱한 남북관계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젖염소 사역을 이어오게 했던 것이다.

그 심정을 2014년 10월호 <CCC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50여 차례에 걸쳐 북한 곳곳을 방문한 것은 북한의 많은 사람들에게 목사 선생으로서의 영향력과 마음을 전해 주는 특별한 기회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복음의 선발대의 심정으로 길을 열면 후일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따라 나아갈 것이고, 남과 북이 하나의 나라로서 자유롭게 왕래하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국토 통일 이전에 사랑의 통일, 사람의 통일을 준비하는 길이라 믿고 작지만 북한 선교의 창문을 활짝 여는 역할을 하였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단으로 방북한 사람들이 41차례에 걸쳐 150여 명에 이르렀고 27억 원 규모의 사랑을 나누는 기적을 만들었다. 우리의 나눔으로 유산양(乳山羊) 되신 예수님을 닮은 젖염소들이 북한 산야의 곳곳에서 지금도 번식하여 어려운 북한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관우 목사는 CCC 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참여했던 젖염소보내기운동이 북한 주민들을 살리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 국토 통일이나 체제 통일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의 통일, 사람의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는 걸 신앙처럼 굳게 믿고 있었다.

한국CCC 설립자인 고 김준곤 목사는 생전에 CCC 간사들에 종종 이렇게 헌신을 당부하곤 했다. “저는 여러 간사님들을 이 민족의 제단 위에 각을 떠서 드리고 싶습니다. 이 민족이 복음화되는 일에 여러분을 각을 떠서 제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을 각을 떠서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드린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만큼 민족 복음화는 김준곤 목사에게 절체절명의 소명이었고, 거기에 간사들과 학생들을 헌신케 하는 것은 평생의 과업이었다. 거기에 수많은 학생, 졸업생, 간사들이 민족을 위해, 통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 중 하나고 이관우 목사였던 거고. 북한에 식량난이 극심하던 1990년대 중반 CCC가 앞장서서 북한돕기에 나서고, 1990년대 후반 젖염소보내기운동에 나섰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CCC가 했던 젖염소보내기운동을 북한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평가하고 있을까. 은정CCC 염소목장은 북한 최대의 종축(種畜) 목장으로 여의도 면적(84,000평)의 2.3배에 달한다. 2003년 6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 방문한 데 이어 김용순 비서가 마지막 외부활동을 했던 곳이다. 그만큼 북한으로서는 국가적 관심사를 이곳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CCC가 적은 풀로도 많은 젖을 생산하는 젖염소를 지원한 데 이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목초씨, 최신 착유기 등을 지원했던 것이다.

CCC와 함께 여러 차례 방북했던 강영식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은 CCC가 펼쳤던 젖염소보내기운동에 대해 “기존 (북한이) 해오던 젖염소 키우기를 서너 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계기가 됐다. 적게 먹고 많은 젖을 생산하고, 관리가 편한 종축을 도입하고, 또 그것을 위한 목초라든지 시설, 산양유를 짜고 가공해서 요구르트나 치즈로 만드는 기술과 시설 이런 게 종합세트로 들어갔다. CCC가 지원을 한 다음부터 북한도 굉장히 힘을 받았다. 그런데 2008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더 현대화, 전국화시키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고 평가했다.

지난 7월 1일, 고인의 유골을 묻으며 부인 정종미 사모는 이런 얘기를 털어놨다. 4년 전 고인에게 간암이 발병했을 때 맡은 사역들을 다 내려놓길 바라고 호소했건만 고인은 “이대로 사역하다 가고 싶다. 보내 달라”고 부탁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노라고. (유코리아뉴스)

제2, 제3의 이관우를 기다리며

선교는 ‘미전도 종족’의 주민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미전도 종족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과 하나되어 마침내 그들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것, 그것일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바울의 성육신적 사역이 그 둘 다를 보여준다. 북한선교, 그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일컫는 통일선교도 마찬가지다.

고 이관우 목사의 장례식은 ‘통일선교 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젊음을 바쳤던 CCC, 그가 연합하고자 했던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를 비롯한 통일선교 단체들의 뜻을 담은 것이다. 남북을 하나로 잇고자 했던, 아니 그의 기도와 신앙 속엔 남북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오롯이 하나였던 그 짧지만 묵직했던 발자취 때문일 것이다.

장례예배(천국환송예배)에서 오정현 목사(사랑의교회)는 “제2, 제3의 이관우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CCC 박성민 대표도 <CCC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들(북한 주민들) 자체가 생존할 수 있도록 어떤 형태든 간에 기본 생존권을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나라에서도 이것을 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해야 한다…나중에 통일이 되어서 ‘한국교회가 북한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최소한의 것, 최소한의 참여는 이루어졌다고 확실히 대답해야 한다. 그 최소한의 참여가 젖염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젖염소보내기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기회에 최소한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가 꿈꿨던 ‘통일선교’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남북관계는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언제 회복될 수 있을지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때, 제2, 제3의 이관우가 되는 길, 남은 자들의 몫은 뭘까. 필자는 여차한 사정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수년째 중단되고 있는 젖염소보내기운동을 다시 잇는 것이라 생각한다. 남녘의 사랑과 헌신으로 보냈던 젖염소가 북녘에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의 새끼가 낳고 자라 북녘의 산하를 뒤덮는 일, 사랑의 젖염소 때문에 북녘도 남녘도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미워할 수 없는 세상, 하나님 나라를 닮은 새로운 통일조국, 아마 그 일을 위해 고인은 지금도 기도로, 넋으로 쉼 없이 남북을 오가고 있지 않을까.

다행히도 고인이 함께하거나 관여했던 개인이나 단체들에서는 그의 순교적 삶을 본받자는 믿음의 결단들이 이어지고 있다.

 

고 이관우 목사가 걸어온 길

1963년 9월 25일 전남 신안군 비금면 용소리에서 출생

1981년 고3 시절, 전도하러 왔던 전남대CCC 팀을 통해 예수님 영접

1982 조선대 기계설계과 입학, 그해 심천 미루나무숲에서 간사의 삶, 북한선교의 삶에 헌신

GCTC 8기 졸업 및 NLTC 전임간사

순천CCC 대표

서울CCC 북동지구 책임간사

1991. 12. 19 CCC 후배이자 동역자인 정종미 사모와 결혼

1998년 8월 젖염소보내기운동 모금국장

1999. 8. 4 상원목장에 젖염소 450마리 지원

2000. 6. 4 김준곤 목사,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 및 30억 모금 계획 발표

2001. 1. 3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함께 젖염소 120마리 지원

2001. 10. 23. 남포항 거쳐 은정리에 젖염소 100마리 지원

2002. 2. 27 320마리의 젖염소와 간이착유기 지원

2002. 6. 11 치즈 가공설비, 급수시설, 트랙터, 약품, 건초 200톤 등 지원

2002. 10. 16 젖염소 140마리, 약품, 사료 34톤 지원

2003. 8. 13 착유설비, 포장설비, 냉각기, 유리병, 건설자재 등 지원

2003. 10. 18-25 착유설비와 가공설비 지원
2011. 12월. 마지막 방북. 이때까지 50차례 이상 방북

2013. 11.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발기인 참여

2014 ~ 2016.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사무총장

2017. 6. 29 55세 일기로 소천

 

고 이관우 목사의 마지막 길(발인)을 환송하는 통일선교 관계자들과 유족들. (유코리아뉴스)

고 이관우 목사의 묘원 정면에서 약간 오른편엔 이제는 폐쇄돼버린 개성공단이 자리한다. (유코리아뉴스)

고 이관우 목사의 묘원에서 왼편으로 눈을 돌리면 임진강 저 너머를 바라보면 고인이 생전 수십 차례나 방문했던 은정리 CCC 젖염소목장이 있는 곳이다.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op_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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