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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선 교수가 말하는 ‘남북화해의 진정성’

기사승인 2019.09.25  09: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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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선 교수의 ‘내가 겪은 한국전쟁, 분단 그리고 화해의 길’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통역을 했다. 해방감이 밀려왔다. 원수를 갚겠다는 앙심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통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서광선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명예교수(당시 KNCC 대표단)는 1991년 캐나다 NCC 주최로 열린 ‘한반도 평화와 통일세미나’에서 강영섭 목사의 강연을 통역했다. 얼결에 받은 부탁이었다. 부탁한 이는 조선기독교도련맹 대표였던 강영섭 목사, 서 교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의 아들이었다. 힘겹게 통역을 마친 그는 분노가 아닌 해방감을 느꼈다. 오랜 앙심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23일 서울 정동 달개비에서 열린 통일연구원 화해포럼에서 그때의 소회를 전한 서 교수는 “상대방을 풀려는 노력 이전에 우리 자신이 풀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유코리아뉴스

서 교수는 1931년, 자강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만주에선 해방 설교를, 북한에선 반공 설교를 하던 목사였다. “무신론자인 공산당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 설교해서 교인들로부터 월남을 권유받던 인물이었다. 1948년 겨울, 공산당 정권을 지지하는 기독교연맹을 조직한 강양욱 목사는 그런 아버지에게 연맹 가입을 종용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이후 전쟁 터지기 3개월 전부터 예비 검열이 시작됐다. 신학교 교원들이 행방불명 되더니, 그의 아버지도 심방 하러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

1950년 9월, 매일 같이 융단 폭격이 가해지더니 평양은 불바다가 됐다. 이윽고 미국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다. 어린 서 교수는 만세 부를 겨를도 없이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대동강 강둑에서 아버지와 네 명의 목사가 온몸에 총탄 자국이 난 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 다짐하며 장례를 마친 그는 남한으로 내려와 해군통신병으로 일했다. 그러다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몬타나의 한 기독교대학을 거쳐 뉴욕 유니온 신학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미국의 시대정신이 자유언론운동과 여성해방, 히피, 반전운동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흑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흑인해방운동에 참여했다. 

1969년 귀국한 이후로도 다르지 않았다. 서 교수는 이화여대 교수로 있으면서 반독재투쟁 대열에 섰고, 1975년 유신독재 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학원 사태’로 해직됐다. 전두환 신군부 치하에서 투옥당했을 땐 본훼퍼의 옥중 서한을 흉내 낸 옥중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이후 서 교수는 한국 교회사의 기념비적 업적인 88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흔히 ‘88선언’으로 부른다)’은 체제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북한의 동포들을 적대시한 한국교회의 죄책을 고백하며, 통일의 5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민의 참여, 인도주의)을 제시했다. 88선언은 이후 노태우, 김대중 정부의 통일 정책에도 반영됐다. 

그렇게 남북통일운동에 앞장서던 서 교수는 1991년 캐나다에 북한의 강영섭 목사를 만났다. 강 목사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강양욱 목사의 아들이었다. “반갑다고 손 내미는데 마음이 어찌나 힘들던지..” 서 교수는 원수와 평화를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심지어 강 목사는 자신의 주제 강연을 통역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난감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라 얼결에 통역을 맡았다. 

“통역을 마쳤는데, 국가보안법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원수 갚겠다는 앙심에서 풀려난 해방감이 밀려왔다. 이제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23일 오후 달개비에서 열린 통일연구원 화해포럼에서 참석자들이 '내가 겪은 한국전쟁, 분단 그리고 화해의 길' 주제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곡절 깊은 인생을 풀어낸 후 서 교수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 정치·역사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 구조를 허무는 것이 궁극적으로 원수 갚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과 북이 함께 잘 먹고 명랑하고 살고 싶은 ‘생명의 욕구’에 대해 전했다. 

끝으로 서 교수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북한 사람을 만나도 마음의 문을 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면서, 민간교류를 하기 위한 분위기와 환경 조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풀려는 노력 이전에 우리 자신이 풀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머리의 문제도 있지만, 가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서 교수가 강조한 화해의 진정성은 남북 교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현 시점에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정지연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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