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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일본 도잔소 남북교회 만남 비화(祕話)

기사승인 2019.09.30  15: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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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광선 교수의 ‘내가 겪은 한국전쟁, 분단 그리고 화해의 길’②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23일 통일연구원 화해포럼에서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과 그 해 가을 평양 수복 과정, 이후 서울로의 피난 과정 등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직접 목격한 한국교회의 이면을 회고했다.

1950년 10월 중순이었다. 서 명예교수는 “평양 수복 소식을 듣고 숨어 있던 평양 시민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그려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군 환영대회를 연 것”이라며 “하지만 그런 군중을 향한 무차별 폭격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나는 운좋게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미군은 또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 소식에 대동강철교와 화약고들을 잇달아 폭파했다. 그 때문에 대동강을 건너느라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대동강을 건너는 쪽배에 50~60명이 달라붙는 바람에 그대로 강물에 잠겨 아비규환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 명예교수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절대 전쟁을 생각해선 안 된다”며 “누가 옆에서 물에 빠져 죽고, 폭파로 죽는 걸 본 사람은 ‘전쟁’ 얘기만 들어도 치를 떤다”고 말했다. 구사일생으로 대동강을 건넌 사람들도 서울행 화물차 꼭대기에 겨우 매달리다시피 타고 오다가 떨어져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도 했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3일 달개비에서 열린 통일연구원 화해포럼에서 직접 경험한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비화(祕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왼쪽은 포럼 사회를 맡은 손원영 서울기독대 교수. ⓒ유코리아뉴스

“서북청년단, 언젠가는 진실 규명될 것”

서울 도착 후 누군가의 인도로 찾아간 곳은 영락교회. 서 명예교수는 “당시 영락교회는 북에서 떠난 사람들의 집합지, 연락소 같은 곳이었다”면서 “그 연락소가 피난민들의 숙소가 되었다”고 당시 영락교회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북청년단 얘기도 꺼냈다. 우익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은 제주 4.3사태를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 폭력적인 우익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서 명예교수는 “영락교회는 당시 서북청년단의 아지트였다”며 “그 청년단을 만든 게 한경직 목사였고 그걸 이승만 대통령이 지원해서 제주 등에서 학살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청년들은 저보다 몇 살 위로 주로 이북에서 지주였던 교회 장로 아들들로 1946년 김일성의 토지개혁 때 땅을 몰수당했다”며 “그들은 공산당에 복수를 하려 했고 그들을 이용한 게 미군과 이승만 정권”이라고 밝혔다. 서 명예교수는 “4.3사태를 일으킨 건 서북청년단”이라며 “교회에서도 서북청년단 얘길 잘 안하려 하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규명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방 정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1947년 1월 미군정에서 실시한 앙케이트, 이른바 남한 인구 사상조사다. 서 명예교수는 “당시 인구의 78%가 이승만보다 김일성을 선호한다는 앙케이트 결과가 나왔다”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 다 빨갱이라고 생각해 미군을 잘 다스릴 거라 생각했고, 남한 사람들은 북한에 크리스천들이 많기에 김일성을 잘 안내할 거라 믿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 수도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군목들 중엔 일제 강점기 선교사들로 있다가 쫓겨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알선으로 선교사·목사·장로·순교자 가족들을 서울에서 기차에 태워 부산으로 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서 명예교수도 거기에 포함돼 부산으로 내려갔다. 낮에는 부두에 가서 일감을 찾거나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자원 입대해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다. 서 명예교수는 해군소년통신병 모집에 응시해 당시 5: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해 진해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1951년 1월의 일이다.

그는 “당시 교관들이 다 일본 해군 졸병 출신이었다.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았다”며 “해군훈련소에서도 이승만 정권의 친일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아침, 저녁 이유도 없이 ‘빠따’(방망이)를 맞았다고도 했다. 서 명예교수는 “교관이 ‘빠따’를 때리면서 하는 말이 ‘일본군보다 우리 군대가 더 강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군에서 했던 것처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식으로 한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해군소년통신병학교를 수료할 때는 서 명예교수가 1등을 차지했다. 2등은 민경배 연세대 명예교수였다. 이를 계기로 서 명예교수는 이후 미국 유니온신학교,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유학도 할 수 있었다.

 

“일본 도잔소 남북교회 만남은 부인들 때문에 성사된 것”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교회 지도자들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일화도 소개했다. 서 명예교수는 "관계된 분들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사실상 최초의 비화(祕話) 고백인 셈이다. 그는 당시 이화여대 해직교수 신분이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북한 사람을 만나려면 중앙정보부의 접촉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서슬 시퍼런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의 접촉승인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길이 열렸다.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 선교훈련원장 겸 통일연구원장이었던 오재식 박사의 부인과 서 명예교수의 부인 함선영은 이화여대 영문학과 동기였다. 함선영은 당시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이 당시 안기부 차장 부인이었다. ‘부인들’을 통해 마침내 안기부와의 만남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서 명예교수에 따르면 지금의 서울 을지로 프레지던트호텔의 맨 꼭대기에 안기부 안가가 있었다. 거기서 안기부 차장을 만났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시청 앞에서는 ‘전두환 물러가라’며 데모가 한창일 때였어요. 그 차장으로부터 ‘전쟁 중에도 평화협상을 하는데 남북도 교류를 해야 한다’며 ‘7.4 성명 이후에 이런 게 없었는데 잘 됐다’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 20명이 일본 도잔소에 가게 됐고 역사적인 남북 교회 지도자의 첫 만남이 성사된 거죠. 부인들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죠(웃음).”

서 명예교수는 남북의 화해를 위해서는 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기초위원으로 참여했던 1988년 2월의 역사적인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엔 ‘죄책고백’이 담겨 있다. 88선언 3항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고백’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그러면서 △분단으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긴 죄 △민족분단의 역사적 과정에서 침묵한 죄 등 한국 그리스도인과 한국교회의 죄를 고백하고 있다.

서 명예교수는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 어른들이 우릴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자신들이 당했는데 왜 죄책고백을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목사, 장로들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우리 보고 빨갱이라고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그 분들은 하나님보다 미군을 더 신뢰하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빨갱이’ 논리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은 상대방이 풀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풀어야 한다고 했다. 상대방 눈속의 티끌을 빼기에 앞서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서 명예교수는 “이런 것이 진정한 대화, 평화의 자세”라며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주 만나야 한다. 남한 내 좌우도 자주 만나야 한다”며 “남남 속에도 불신이 있는데 70년 적대관계로 살아온 남북은 어떨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평화=사랑+정의’라는 자신만의 공식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랑만 가지고는 안 되고 반드시 정의가 동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 도우미 아주머니 얘기를 들려줬다. 그 도우미 아주머니가 부인에게 5년 만에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자 부인은 ‘그동안 잘 챙겨줬었다. 이해가 안간다’고 대응했다. 이에 대해 서 명예교수는 “받아야 할 월급은 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폭력”이라며 “사랑 없는 정의는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랑을 얘기해야 할 때 정의를 얘기하거나 정의를 얘기해야 할 때 사랑을 얘기하면 거짓말”이라며 “사랑과 정의는 양립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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