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한반도 위기 그리고 지미 카터와의 만남

기사승인 2017.10.23  11:19:00

공유
default_news_ad2
ad43

- 조동진 목사의 ‘내가 헤쳐온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사’(1)

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의 열하루

1976년 미국에서는 11월 6일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긴장했다. 카터 대통령 당선자는 이 해 크리스마스 메시지로 주한 지상군 철수를 공식 발표했다. 나는 이 무렵부터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신 정권이 안으로는 강권(强拳) 정치를 더욱 강화하면서, 남북 관계는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국회는 ‘평화통일협의회’를 설치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때까지 아무도 민족통일 문제에 앞장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먼저 장로교의 중심 교파인 통합측과 합동측의 40대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을 모아 「북한해방(민족해방) 기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나는 이 운동의 대북활동위원장을 맡고, 제2세계(공산권) 연구소 소장직을 겸직했다. 통일원장관이던 이용희 박사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신변을 걱정했다. “통일원조차도 북한 문헌과 정보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는데... 중앙정보부가 가만히 있을까?”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그의 말이다. 이용희 장관은 기미년 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이갑성 씨의 아들이다. 이용희 장관의 우려는 단순한 우려로 끝나지 않았다. 지미 카터가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희망하면서 미·남·북의 3자회담을 제의하고 나서자 박정희 유신정권의 긴장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박 정권의 미국 민주당 정권에 대한 불신은 높아가고만 있었다. 나는 국회의 평화통일위원회와 관련된 사람들과 개별적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기독교계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 「민족통일을 위한 기독교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나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 유신 대통령의 비위를 거스른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잘 아는 한 고위 관리가 “목사님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국제우편과 국제전화를 가장 많이 받는 열 사람 중의 한 분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내가 정보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인 줄은 몰랐다. 나는 1975년 아세아선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피선된 뒤 많은 국제 관계 문헌, 특히 외교문서와 국가수반들의 강연과 뉴스 브리핑 자료들을 조직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매주 발행되는 백악관 보고서와 국무성 국무장관 보고서도 꼬박꼬박 나에게 배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의 분석 결과는 나의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의 기초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드디어 화근의 날이 왔다. 1978년 5월 둘째 주일이 지난 다음 날이었다. 나는 이 날도 아세아방송국 창립 당시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김형근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입수한 미국 상하의원 명단과 그 중에서 기독교 각파 출신 상하의원 명단, 그리고 백악관의 새 대통령 지미 카터를 보필하는 비서진과 보좌관들의 명단을 보여주었다. 김 회장은 매우 흥미가 있어서 그 종이를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나는 무심코 그 쪽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검은 잠바를 입은 건장한 두 사람이 집안을 온통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남산에서 왔다고 했다. 정보부에서 왔다는 말이다. 그들은 나에게 다짜고짜로 남산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난생 처음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CIA 남산 청사에서 이유 없는 취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조사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집요하게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물었다. 내가 조금 안심한 것은 ‘북한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간첩’ 혐의를 씌우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주일을 조사받고 난 어느 날, 나는 깊은 지하실 감방으로 옮겨졌다. 갑자기 나를 취조하던 사람이 노기 띤 얼굴로 내 앞에 내민 것은 내가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비서진과 보좌관들 중 기독교인들만 골라 적었던 종잇조각이었다.

나는 놀라서 “이게 뭐요?” 하고 물었다.

“보면 몰라?”

나는 그때야 생각이 났다. 내가 잡혀오던 날 낮에 김형근 회장이 달라는 대로 그에게 준 종이쪽지가 국회의원들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백두진, 정일권, 신범식 등 의원들도 정보부에 불려왔다. 박정희 유신 대통령은 미국통으로 보이는 이런 국회의원들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사흘이나 더 나는 심한 문초를 받았지만, 내 입에서 나올 말이라는 것은 아무런 정보적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한 목사요, 선교 운동가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기독교의 각성과 통일을 위한 열기(熱氣)를 일으키는 민족 교회 운동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동진 박사 ⓒ이상범 제공

유신 정권의 정보부는 나를 강제 연행하여 남산 지하실에서 취조하기 시작한 지 11일 만에야 풀어주었다. 이번 나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자신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대통령과 독특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아는 그는 나의 모든 것들이 자기의 자리 지킴에 걸림돌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는 ‘미국이 정보부장을 교체하도록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는 정보를 내 주변에 붙여두었던 첩보원으로부터 입수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그러한 정보의 진원지를 찾아내라고 했다. 그리고 내 사무실이 그 진원지로 지목되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에게 나를 미국 스파이 혐의가 있다고 보고하며 구속 조사를 해야겠다고 했던 것이다.

카터 대통령과 박정희 유신 대통령의 만남

1979년 6월 30일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서울에 왔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일로 유신 정권의 박해를 받았던 나는 지미 카터의 가정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전도자로, 목회자로, 주일학교 성경 교사로 미국 동남부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땅콩 농장의 농장주로 대대로 조지아 주 플레인즈에 살고 있던 평범한 미국 사람이었다. 그가 한국에 왔던 1979년으로부터 13년이 지난 훗날 1991년 6월 6일 플레인즈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쓰고 있던 조그마한 카터가(家)의 저택에 초청을 받았다.

미국의 양심을 되찾을 수 있는 도덕 정치의 상징적 대통령으로 등장한 지미 카터는 월남 전쟁에서의 미군 철수에 이어 한국에서의 미군 철수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지미 카터는 이제 미국 시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박정희 유신 대통령에게 그 일을 선언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다. 카터 대통령은 미군의 연차적인 철수 계획을 박정희 유신 대통령에게 선언했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3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국의 정책을 전달했다.

카터 대통령이 김일성 북한 주석의 초청을 수락하다

내가 1991년 6월 6일 저녁,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집에서 사사로운 대화를 하던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대통령이었던 당시의 그 정책은 지금도 변함없이 미국의 대한정책이라고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남한의 목사와 북한의 UN 대사인 한시해가 함께 미국 대통령의 사저로 카터 대통령을 찾아온 데 대하여 카터 자신도 퍽 놀라는 모습이었다. 카터 대통령의 평범한 서재의 적은 응접실은 나와 한시해에게 또 다른 인상을 심어주었다.

“조 목사께서 앉아 계신 자리는 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나를 찾아온 당시 중앙정보국장 조지 부시가 앉았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그가 공화당에 의하여 대통령이 되었지만...” 지미 카터 대통령이 나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한 말이다.

초라하기까지 한 이 적은 응접실의 보잘것없는 낡은 의자 하나에도 뜻을 부여하면서 첫 인사를 나눈 장면의 사진을 나는 지금도 때때로 들춰보곤 한다. 한시해 대사는 정중하게 “대통령님의 환대를 받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하고 인사를 갖추었다. 카터 대통령은 “귀 국의 최고 영도자 김일성 주석께서는 건강하신가요?” 하고 한시해의 인사에 응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미국과 북한간의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매우 필요한 때라는 데로 모아졌다. 카터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이었을 때에 주장한 남·북·미 3자회담 이야기를 꺼내면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에 미군의 점진적 철수와 평화를 위한 3자회담이 필요하다는 그때의 결정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한시해 대사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이름으로 지미 카터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희망한다는 공식 초청을 정중하게 전달했다. 그때 카터 대통령의 반응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미국 정부는 모든 분쟁 지역의 해결에 전직 대통령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나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부터 재직 당시보다 더 바쁘게 아프리카와 중동과 아시아 등 각 지역의 분쟁 해결을 위해 화해 사절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시해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고 응답하면서 카터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귀 국의 영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나를 초청하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1991년 전 북한 대사 한시해와 지미 카터 대통령 방에서 환담을 하고 있는 조동진 박사(오른쪽). ⓒ이상범 제공

성공한 화해사절

1994년의 상반기 여섯 달의 평양과 서울, 워싱턴 사이는 숨가쁜 긴장과 방금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전쟁 폭발 직전의 긴박 상태의 연속이었다. 평양 당국은 이 해 3월 13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의 탈퇴를 선언했다. 워싱턴 당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UN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위협하면서 북한에 대한 강경 압박 수단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 당국은 “더 이상의 핵사찰은 받지 않겠다.”는 강경 대응으로 맞서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성명했다. 북한 외교부는 IAEA나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IAEA나 UN 안전보장이사회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압력이 결코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당국의 마음 읽기에 바빴고 결국 평양의 뜻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있음을 확인했다. 부시 행정부 당시부터 북한이 대미 비공식 대화 창구로 지목하고 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적극 고려된 것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논의가 극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 외교부장의 ‘UN의 북한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성명은 클린턴 행정부가 카터 방북 계획을 추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1994년 6월 9일 카터 대통령은 자신이 곧 평양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가 1991년 6월 6일 플레인즈에 있는 그의 사저에서 나와 함께 그를 방문했던 한시해 전 북한 UN 주재 대사를 통하여 김일성 주석의 평양 방문 초청을 받고 이를 수락한 지 만 3년만의 공식 발표였다.

카터 대통령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인 14일 오후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날의 대화는 카터 대통령의 미국과 남한의 대북 화해사절로서의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한미 양국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하여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터 대통령은 6월 15일 판문점에서 군사 분계선을 건너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동안 평양에 머물렀다. 그의 평양 체류 4일간의 북·미·남한간 화해사절로서의 역할은 길이 역사에 남을 만한 뜻깊은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국가 주석으로부터 대미 적대관계 종식을 위한 새로운 관계 조성을 바라는 구체적인 제안을 받았다. 금수산 의사당 주석궁에서의 회담과 대동강에서의 선상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은 김 주석으로부터 많은 제안과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김 주석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대하여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UN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추진을 중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김일성 주석은 카터 대통령의 이러한 약속에 대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김 주석은 북한의 발전용 원자로를 현재의 러시아식 중수로형 원자로에서 미국식인 경수로형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하고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대하여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에 대하여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도록 하겠다고 응답했다.

카터 대통령의 화해사절로서의 방북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북과 미국의 관계 개선만으로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카터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서울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내는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구두 메시지를 가지고 와서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 메시지는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김영삼 대통령을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6월 18일 청와대에서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김일성 주석의 이 메시지를 전달받은 김 대통령은 즉석에서 이 메시지를 수락한다고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하고 “조건 없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겠다”고 했다. 그리고 필요한 실무적인 내용은 양측 실무자들이 협의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카터 대통령의 방북은 남·북·미간의 긴장 국면을 단번에 화해와 협력의 길로 돌아서게 하는 역사적인 평화 선교와 화해사절의 역할을 성취하였다.

이루지 못한 정상회담

평양의 김일성 주석이 서울의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겠다는 제안을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직접 가지고 청와대를 찾았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꼭 정상회담이 성사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미국 국무성은 즉각 “한반도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백악관은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남북정상회담이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린턴은 조용하게 그러나 진심으로 카터 대통령의 남북 정상 간의 중재 역할의 성공을 기뻐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홍구 통일부총리를 남북정상회담 예비회담 수석대표로 선정하고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윤여준 국무총리 특보를 위원으로 내보냈다. 북에서는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을 수석대표로 선정하고 안병수, 백남준 등을 위원으로 선정했다. 이들의 첫 회담은 6월 28일 오전 10시부터 판문점의 남측 회담장인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양측의 예비 모임은 굴곡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7월 25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 제재안의 유보를 요청하기로 했다. 회담의 형식도 합의되고 의전 절차와 경호원의 수와 무기 휴대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합의를 보았다.

이때에 서울의 시민들은 한없이 들떠 있었다. 민족 분단의 문턱을 넘어서서 이제는 통일로 가는 길에 들어서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휴전선 근방의 땅값이 오르고 한강 북쪽의 토지 투기의 조짐마저 보였다. 교회들은 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시민들은 백범 김구 주석이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남쪽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는 역사적 북행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7월 25일에는 남쪽의 김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8월에 서울로 초청하기로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94년 7월 8일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새벽 김일성 주석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평양의 중앙방송은 1994년 7월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이 8일 새벽 2시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남과 북의 전 민족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통일로 가는 역사적인 남북 회담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계속>

정리: 정소민/ 경희대 국제대학원 국제개발협력학 전공 박사과정

조동진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B.D)를 졸업하고 미국 에즈베리신학교(Th.M.), 미국 윌리암캐리대학교(Ph.D.)를 거쳐 국제선교협력기구(KIM)를 창립하고 총재에 취임했다(1961). 동서선교연구개발원(EWC/mrd) 원장, 사단법인 민족통일에스라운동협의회 창립 및 이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선교 트렌드: 1900~2000」, 「THE MISSION」 외 다수가 있다. 번역서로는 1953년 그레이셤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외 다수가 있다.

*이 글은 조동진 목사와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조 목사의 자서전 『나는 사형수의 아들이었다』, 『평양으로 간 목사』에서 발췌 및 편집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정소민 sominy79@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ad41
ad42
ad40
ad39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