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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과의 만남

기사승인 2017.11.08  14: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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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동진 목사의 ‘내가 헤쳐온 기독교 민족통일운동사’(3)

패전 일본이 꾸며낸 소란스런 해방과 부일 협력자들

해방 후 미군정 혼란기 정치 집단들의 계보를 바르게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조 망국(李朝亡國)을 초래한 친일 매국노 세력의 음모와 민족 독립투쟁사를 얼룩지게 한 친일 전향(轉向) 세력의 복잡한 관계를 들추어보아야만 알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1919년 3월 1일로부터 12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1905년 일본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과 압력을 등에 업은 친일 정치조직 일진회(一進會)의 음모로 말미암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라는 국치조약(國恥條約)으로 외교권과 군사권이 일본에 넘어간 직후 생긴 최초의 민족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로 보아야 한다.

이승만은 1905년부터 미국에 있었다. 해방 후까지 대한민국을 지켜온 김구 주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김구 주석은 일제의 1910년 신민회 민족주의 지도자 총검거에 나의 아버지와 함께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검거되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가 신민회에 있다는 증거는 1919년 당시 조직된 임시정부의 각료와 의정원의 과반수가 신민회 회원들이었다는 사실과, 해방 후 환국한 임시정부 각료 요인들 중 김구 주석을 비롯한 이시영, 유동열, 조성환, 윤기섭, 도인권, 이강 등 신민회 창립회원 등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립한 세력은 일제하에서 억압을 받으면서도 지조를 지켜오던 기독교 신민회와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중심의 민족주의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일제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사냥꾼 노릇을 하던 악질적 친일 주구(走狗)들이 갑자기 반공(反共) 민주주의 투사로 둔갑했다. 미군 점령 지역에서 일제 말기에 부일(附日)협력의 길을 택한 전향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일제 앞잡이에서 미 점령군 앞잡이로 둔갑한 친일 주구들과 손잡고 미국에서 온 이승만의 그늘 밑에 모여 이승만을 임시정부 진영에서 격리시키는 길밖에 없었다.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의 뿌리가 그러했다. 한민당의 뿌리는 원래부터 신민회와 임시정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한민당의 바탕은 호남과 영남의 지주들로 일제와 타협하고 그들에게 협조하면서 회색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여오던 지조 잃은 국내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장택상, 김준연, 백관수, 장덕수, 현석호, 서범석 등이 모두 그랬다. 미・소 공동위원회라는 국제적 기구를 등에 업으려는 한민당은 이러한 시세의 풍향에 민감한 기회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국제 감각에 예민한 이승만은 이미 미국이 미・소 공동위원회를 깨고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UN의 이름을 빌려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은 단독선거 반대를 고집하는 임시정부와 좌우합작 세력의 거세 없이는 미국과 이승만의 이러한 전략의 실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백범 김구의 측근을 제거할 음모를 이승만과 함께 꾸며 나갔다.

미국과 이승만과 한민당의 농간

미국 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 반도에 대한 특별한 정책이 없었다. 국무성은 1905년부터 40년 동안이나 미국에 망명해 있던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 까닭은 그가 1930년대 이후에는 별로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중국에 망명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이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비로소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일하던 우리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을 조금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그들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혹시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대를 이용해 볼까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수백 명밖에 안되는 광복군에 실망한 미국은 마지못해 보잘것없는 장비와 얼마간의 무기를 내어주고 그들에게 형식적인 게릴라 훈련을 시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진주한 하지 사령관은 서울의 분위기에서 비로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범민족적 지지를 눈으로 보고 임시정부를 환국시키는 길만이 자기가 직면한 사회 혼란을 진압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무성은 하지의 입장과는 달랐다. 일본 패전으로 승리의 쾌재 속에 안일하게 앉아 있는 워싱턴의 국무성이나 국방성은 조선 반도에서의 ‘해방이 가져온 혁명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 중장에게는 자기 점령 지역에 “조선 사람들이 만든 정부가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을 서면으로 제출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육군성을 통하여 “일본 항복 후 조선의 계획에 있어서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질 만한 영도층이 필요하다”는 건의서를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 ⓒ백범기념사업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망명 생활 40년 만에 서울 여의도 공항으로 환국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 전권 특명 수석대표>라고 밝히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 유명한 ‘대동단결’을 전파했고 미 점령군 사령관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부일협력 총독부 관료 출신의 위장 민족주의 애국자들은 이승만의 이러한 단결구호를 ‘친일세력과 봉건 잔재’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근거로 삼고, 좌익세력과 해외 항일투쟁세력을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은 미 점령군 고위 장성들의 숙소였던 조선호텔의 귀빈실에 투숙하고 국내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한국계 미국 시민으로서의 미국인 대우를 받는 재미를 보고 있었다. 환국 초기에 임시정부 지지를 표방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이승만은 한민당의 그늘 안에 민족주의 애국자로 위장한 친일 관료와 부일 협력자들의 옹립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의 한 가지 약점은 한국 안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누가 친일 부역을 하였는지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반세기 만에 돌아온 이 전설적인 미국화한 노 애국자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를 만나자마자 그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미국 국적의 한국 노인인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봉건 지주 세력과 부일협력자들로 구성된 한민당은 친일 관료 출신 위장 애국자들과 함께 이승만 옹립을 통하여 중국으로부터 환국할 망명 임시정부의 세력을 무력화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의 임시정부 거세 작전은 ‘미 국무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국 정부로도 공식 정부로도 인정할 수 없도록 하지 미 점령군 사령관을 통하여 이승만을 설득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봉건 잔재와 부일 협력자들의 집단이라고 비난받고 있던 한민당은 이승만을 내세워 당 내에 몇 안되는 독립운동 경력자의 존재를 이용하여 미 점령군 당국에서 독립운동 단체로서의 정통성과 애국자들의 집단으로서의 법적 위치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는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이 못마땅하였지만 군정청 내부의 고위 관리들이 친일 관료 또는 부일협력의 배경을 가진 자들로 한민당 간부이거나 그 세력을 지지하는 비호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만이 해방된 조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며 출범한 한민당은 사실상 임시정부 조직의 중심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평생의 적이었던 이승만과 점령국 미국이라는 두 배경을 얻게 되면서 생각이 변했다. 이제는 얼마 후에 중경에서 돌아올 것으로 보이는 임시정부가 저들 일파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보였기에 미국의 세력을 업고 이승만만 내세우면서 그밖의 반대 세력은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무성과 국방성의 계산은 그렇지 않았다. 38도선 이북의 소련군은 처음부터 서울의 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민족 법통의 임시정부를 환국케 하여 대중적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을 부정(否定)하는 수순(手順)을 택해야만 했다.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기는 하였지만 점령군 사령관 하지도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귀국시켜 미 점령 당국의 형식적 지도자로 세우겠다는 의견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미국은 애초부터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의 이익을 위한 이용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귀국케 함으로써만 ‘미국이 남한을 식민지화’하려 한다는 소련의 끈질긴 비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이러한 임시정부 환국 구상의 정보는 미 점령군 군정청 안의 경무국장 조병옥이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의 이러한 계획을 변경하도록 계략을 꾸미는 공작을 했다.

“임시정부 각료들이 개인 자격으로만 환국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이고 “임시정부 각료들 중 보수적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먼저 귀국케 하고 진보적인 혁신 세력 지도자들은 보름 후에 따로 귀국하게 하도록 한다”는 공작이었다. 이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들은 1945년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김구 주석과 조소앙, 엄항섭 등 14명이 먼저 귀국하고, 12월 3일에 김규식, 김원봉 등 나머지 정부요원들이 임시정부 수립 2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백범 김구 주석의 환국 인사는 매우 간략한 것이었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민족의 아픔을 토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다만 나와 나의 동지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1945년 11월 23일 서울 방송국이 보도한 내용이다.

나는 스물 두 살 때 김구 주석을 만났다

김구 선생께서는 귀국하신 다음 해 봄에 쇠약해지신 건강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남산 밑 필동에 있던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내가 백범 선생을 처음으로 뵈었던 것은 1946년 5월의 어느 날 성모병원의 한 입원실에서였다. 이때가 이미 한민당이 우익 정당 연합의 자주 민족주의 노선에서 떠나 친미노선 일변도로 변하여 ‘미국 주도하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독자노선을 취하기 시작한 때였고,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자주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5월 12일이 바로 지난 다음으로 기억된다.

김구 주석께서는 서대문 경교장(京橋莊)에서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국군장교 안두희에 의해 시해되기까지 계셨다. 내가 처음 뵈옵던 백범 김구 주석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의 얼굴은 큰 화강암으로 거칠게 다듬어진 것 같은 굳고도 움직일 수 없이 무겁고도 근엄해 보이는 건국의 아버지로 보였다. 그때 하시던 말씀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의 이름과 나이를 자세하게 물으시고 장래의 계획을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목사가 되어 이 민족의 영혼들을 위하여 봉사하려고 신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말씀이 길지 않으신 채,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장한 결심을 했다고 하시며 크게 숨을 내 쉬시고 옆에 가지고 계시던 엽서만한 사진을 흰 봉투에 넣어서 내 손에 쥐어 주시었다. 그 사진은 김구 선생의 존영으로 지금도 많은 책과 잡지에 보도되는 그 모습의 사진이었다. 뒷면에 자신의 이름을 쓰시고 날짜를 기록해 주시었다. 나는 백범 김구 주석께서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그때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게 보이고 그 크고 따뜻하던 손의 체온을 지금도 느끼곤 한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등 3대 강국의 외상회의에서 「조선반도 5개년 신탁통치안」을 결의한 후 김구 주석은 즉각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선포했다. 1945년(대한민국 27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 제1호의 충격적인 내용이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깊이 못 박혀져 있다. 포고령의 끝에 붙인 9개 항의 행동강령은 강력하고도 단호한 것이었다. 행동강령은 반독립 언동을 경고하고, 신탁통치 순응자를 민족 반역자로 규정했다. 국민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복종하고 규율을 지키라고 했다. 친일 반역분자들의 모략선동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조선 반도 정책을 저울질하면서 온건하고도 미온적인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군정청의 풍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민당은 더욱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찬탁과 반탁의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인민당 등 좌익 정당들이 가장 격렬한 반탁으로 나섰다가 며칠 만에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 지지’라는 방향 전환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민당 당수 고하(古下) 송진우도 ‘미국 후견 하의 신탁통치’라는 조건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발언을 하여 한민당이 군정 종속 집단임을 드러내다가 12월 31일 새벽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피의 투쟁으로 해방 첫 해가 저물고 1946년을 맞으시는 아버지의 가슴 속을 나는 알지 못한 채, 백범 김구 주석의 입원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건국도상의 민족의 어버이 백범 선생을 뵙고 나온 것이었다. 병원을 나오신 아버지와 나는 아무런 대화도 없이 남산 길로 올라섰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머릿속과 가슴 속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지 못했다.

조동진 박사 ⓒ이상범

김준연과 한민당의 음모

김준연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맑스 레닌당의 당원이었던 좌익 성향의 정치 엘리트로 처음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좌익 성분과 출신 지역상 인연과 함께 호남 지주 출신 친일 타협주의 지도자들과 동일선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송진우가 없는 한민당에서 김준연은 당내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졌다. 김준연은 일제하에서의 조병옥과의 친분 때문에 그를 한민당에 끌어들여 미 점령군 사령부에 끈을 대고 있었지만 14년간의 미국 생활과 콜롬비아대학 정치학 박사 출신 장덕수와 조병옥은 같은 콜롬비아대학 동문 관계여서 결국 김준연은 그들 뒤에 가리워져 항상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김준연은 이승만과의 줄이 없었다. 그에 반해서 군정청과 돈암장의 이승만과 경교장의 김구 주석 등 당시 통치 권력의 삼각지대를 마음대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민당 안에서는 오직 장덕수밖에 없었다. 천성적인 달변가로 알려진 장덕수는 우리말과 영어와 일본말을 마음대로 구사하면서 미국이 가장 신임하는 친미 정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당으로서는 이러한 장덕수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없이는 되는 일도 없지만 그로 인해서 한민당의 음모가 경교장의 김구 주석에게 끊임없이 전달된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능은 있었어도 자기 설 땅이 없는 황해도 출신 장덕수는 호남 출신과 친일 반민족 세력 정당인 한민당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조직 기반이 완무(完無)한 실정이었다. 자연히 그는 자신과 동향인 백범 김구 주석의 조직과 배경이 필요했다. 사실 장덕수의 3형제는 모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장덕수는 일곱 살 때부터 백범 김구 선생께서 설립하신 사숙(私熟)에서 김구 선생의 사랑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1917년부터 1919년 정월까지 상해에 있었다. 동생 덕진도 상해로 망명했다. 형 덕준도 동아일보 해외 특파원으로 중국 상해에 있었다.

한민당으로서는 장덕수의 이러한 주변 정치 환경이 그들의 정치 음모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47년 6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한민당은 분열되었다. 소련 측은 미・소 공동위원회 참석 자격을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정당에만 한정하자고 했다. 한민당 내에서는 신탁통치 찬성으로 정책을 돌리고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석하자는 김준연의 세력이 신탁통치 반대를 계속하고 미・소 공동위원회 참석을 거부하자는 세력을 눌렀다. 장덕수는 중간에서 엉거주춤했다. 미・소 공동위원회에 한민당과 한독당이 함께 들어갈 길을 찾기 위해서 그는 거의 날마다 김구 주석을 찾았다. 한민당을 탈퇴하지 않는 한 한민당의 당론을 따를 수밖에 없는 장덕수는 미 점령군 사령관의 뜻과 이승만의 정략 사이에서 자신의 처신과 운신폭이 극단으로 조여들고 있을 때였다. 그때에 그는 다시 대의(大義)보다는 사리(私利)를 택했고 이는 그 자신의 큰 실수였다. 김준연으로서는 장덕수가 그대로 한민당의 최고 정치 책임자로서 남아 있기로 한 것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증오하는 장택상과 손잡아 큰일을 저지르기로 했고 결국 장덕수가 한민당 내에서의 자기 위치를 지키기로 한 것이 자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장택상과 노덕술과 최운하의 임시정부 거세 작전

장덕수가 살해된 지 3일 후인 1947년 12월 5일 장택상은 수도경찰청장 담화로 이렇게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악질 지도자의 유인 교사(敎唆)다”라는 제목 하에 그의 담화 요지를 실었다.

“이번 사건은 중대한 교사 밑에서 무지한 청년을 유인하여 범행을 시킨 증거가 뚜렷하여 이 범죄를 교사한 소위 악질 지도자는 이번에 경찰로서 철저히 추궁 박멸시킬 것이다.”

이러한 장택상의 발표가 있은 지 3일 만에 아버지(조상항)는 국민의회의 다른 정무위원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10일에는 경무부장 조병옥의 이름으로 장택상을 위원장으로 장덕수 살해사건 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12월 11일 발행 조선일보에는 그 위원회 명단을 이렇게 발표했다.

위원장 :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

위 원 : 경무부 수사국장 조병계(趙炳棨)

위 원 : 경무부 수사국 부국장 이만종(李萬鐘)

위 원 :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盧德述)

위 원 : 수도경찰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

위원들은 하나 없이 모두 철저한 일제 앞잡이로 독립운동자를 사냥하던 악질 고등계 형사(일제 당시 고등계(高等係)란 일제가 식민지 공안(公安)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립운동 조직 색출을 담당한 악명 높은 부서를 말한다) 출신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노덕술, 최운하 등은 악질 고등계 형사로 고문귀(拷問鬼)라는 별명이 붙었던 최고의 민족 반역자들이었다. 이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일생 불구자(不具者)가 된 민족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장택상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세력을 거세(去勢)하기 위한 목적 수사를 하고 있었다.

한민당은 장덕수가 살해된 지 18일 만인 12월 10일 ‘테러배후 규명 대책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임시정부 추대 세력=한독당=김구 주석’이라는 공식에 맞추어 그 방향으로 이들을 몰고 가기 시작했다. 한민당은 장덕수 피살 사건을 임시정부 계열과의 연계해 배후 조작수사를 하기 위해 이 사건의 재판권을 조선인의 손에서 미 군사재판으로 이관하도록 하는 공작이 필요했고, 임시정부 추대 세력 거세 작전은 그들의 각본대로 착착 진행되었던 것이다. <계속>

*이 글은 조동진 목사의 자서전 『나는 사형수의 아들이었다』 1-3권에서 발췌했습니다.

정리: 정소민/ 경희대 국제대학원 국제개발협력학 전공 박사과정

정소민 sominy79@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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