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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에 새겨진 민족의 수난사

기사승인 2017.01.19  17: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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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문화혁명을 이긴 한국인 신철> (여울목, 2015) - 연변판 ‘태극기 휘날리며’

신철. 지금부터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1945년 해방거리에 서 있던 스물 하나 청년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신철은 출셋길을 버리고 1948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공산당에 속한 우리나라 청년들을 설득하고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의 전운은 이미 감돌고 있었다. 신철은 인민군을 설득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자 했다. 그의 노력은 얼마못가 수포로 돌아갔다. 같은 해 겨울께 인민군에게 정체가 발각돼 총살 위기에 처했다.

신철은 체포 현장에서 오래 전 헤어져 생사조차 몰랐던 동생 신상철을 만났다. 동생 신상철은 인민군 장교가 돼 있었다. 두 형제의 극적인 재회였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이었다. 신상철은 신철에게 “형님, 제발 살아 달라”고 말을 남기고 그를 풀어줬다. 자신은 그 길로 한국전쟁에 참전, 전사했다.

이후 신철은 중국 땅에서 사상범으로 낙인찍혀 30년간 옥살이를 했다. 형기를 모두 채우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신철은 남으로도 북으로도 가지 않았다. 압록강이 바로 보이는 요녕성 왜두산에 위치한 교회에서 탈북자들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아이들을 도우며 여생을 보냈다.

<문화혁명을 이긴 한국인 신철>은 류연산 교수(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가 신철의 구술에 사료를 보태 쓴 전기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서로서 평가 받기 충분하다. 동시에 신앙서로서 읽히는 데 부족함이 없다. 무신론자였던 류 교수는 임종 전 기독교로 회심했다고 알려졌다. 신철의 영향이었다. (필자 주)

2015년 여울목에서 펴낸 <문화혁명을 이긴 한국인 신철>. 연변대학교 류연산 교수 (조선-한국학)가 신철의 구술을 토대로 썼다. 기독교 역사학자 박정신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는 추천사에서 “신철의 역사, 신철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썼다.

광장의 횡포

광장의 특성은 개방성이다. 광장에서는 누구라도 모일 수 있고, 누구라도 자기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에서는 날마다 각종 집회가 열린다. 집회가 다양한 것처럼 그곳에서 나오는 말들도 다양하다. 2015년 광화문 광장에서도 대통령 탄핵, 국정원, 반공, 메르스, 종북, 빨갱이 따위 말들이 무성했다. 그 말들 중에는 ‘해방70주년’과 ‘분단70주년’이란 말도 있었다. 필자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평범한 이 사실을 목격한 이후 쓰린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보냈다. 희망의 언어 해방과 절망의 언어 분단이 같은 말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말이 난립하는 거리에서, 서로 다른 두 말은 하나의 말로 부조화하게 쓰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시위하는 듯했다.

분단 70주년이란 말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분단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 70주년이라는 숫자가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고 외치던 사람들의 아우성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언젠가는 흩어지고 만다. 지금은 분단을 기억하는 세대의 시대가 아닌 일상조차 피곤한 세대의 시대이다.

지금 광장에서는 여전히 해방과 분단이 같은 말로 쓰인다. 문득 70년 전, 같은 거리에 서 있던 청년 신철이 떠올랐다. 그는 해방이 곧 분단이 되는 역사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당대의 청년 지식인이었다.

1945년 해방거리는 스물 하나 청년에게 두 가지의 말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하나의 말은 계급과 사유재산을 타파해야만 민중이 살 수 있다고 했다. 또 하나의 말은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보장해야만 민중이 살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개인이 거스를 수 없는 광장의 요구였다. 그러나 신철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였다. 광장의 특성이 개방성인 것처럼 광장의 요구 또한 선택의 개방성을 담지 해야만 한다. 선택의 자유가 없는 요구는 침략의 다른 말에 불과한 것이다.

민중이 환호하는 해방거리에서 청년 신철의 심정은 이러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누구나 제 입속으로 하얀 쌀밥을 밀어 넣어야 살 수 있다. 사람 입속으로 쌀밥을 밀어 넣어주지 못하는 이념은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공수표에 불과하다. 신철이 광장의 요구를 포기한 까닭은 두 이념이 순수하게 민중의 삶을 위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생떼처럼 쏟아지는 “대한독립 만세!”가 구슬프게 들린다. 해방거리의 환호성은 곡성과 다름없다.

종로 거리에서 발생한 좌우대립. 해방거리는 우리 민중에게 두 이념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신앙을 택한 청년

신철이 광장의 말을 신뢰하지 못한 것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그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신뢰했다. 신철은 이렇게 말했다.

“복음에는 국경도 없고 민족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어느 한 나라나 어느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나라를 섬기고 민족을 섬겨야 하는 개체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애국애족은 절대 대립되지 않는다. 나라를 잃고 상가 집 개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 망국노의 정신적인 지주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악을 처벌하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일부분이다.

하나님은 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과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악이다. 일제의 악에 저항하고 일제의 악을 처벌하는 것은 정당한 평화의 의무이다. 국적을 막론하고, 민족을 막론하고, 피부색깔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다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들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더러 서로 사랑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인간을 제도의 종으로 탈락시키고 동료 피조물들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인간관계를 붕괴시키는 것보다 더 비인간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 타락의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침략이 악한 것처럼 한민족을 갈라놓은 광장의 말 또한 악한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권력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어나갔고, 북쪽에서는 이념을 위해 신앙인들이 죽어나갔다. 신철은 앞서 말했듯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였다. 광장의 요구를 거절한 대가는 컸다. 한반도 어디에도 그가 정착할 곳은 없었다. 그는 고향이 아니라 남의 나라 왜두산 자락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최후는 젊은 시절, 광장의 요구를 거절한 그 순간에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피는 이념보다 진하다고도 하고, 이념은 피보다 강하다고도 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분단이 70년이나 지난 현재로서는 이념이 피보다 강한 듯 보인다.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신철의 삶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의 전운은 1948년에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신철은 이 전쟁을 막고자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공산당에 속한 우리나라 청년들을 설득하고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이기도 했지만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한동안 국공합작의 길을 걸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우리나라 청년들도 각각 국민당과 공산당 소속으로 일본과 싸웠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에 돌입했다. 우리나라 청년들도 서로 적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서막이었다.

헤어진 동생과 극적인 만남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자 했던 신철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군들에게 정체가 발각돼 포로가 되고 만다. 운명의 장난일까. 그를 체포한 인민군이 어린 시절 헤어져 생사조차 몰랐던 그의 친동생 신상철이었다. 신철은 해방 후 헤어진 가족을 애타고 찾고 있었다. 애타게 찾던 동생을 남의 나라, 그것도 서로 죽여야 하는 적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신철은 동생과 재회한 자리에서 두 형제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눈 오는 서울 거릴 걷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형님은 꼭 사셔야 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종으로 공손히 사십시오.”

동생 신상철이 형 신철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었다. 신철은 석방됐다.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총살형에 당할 처지였다. 이후 신상철은 한국전쟁 참전해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신철과 신상철의 마지막 만남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무리 이념이 강하더라도 피보다 진할 수는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을까.

신철의 청년신록은 속절없이 지고 만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쟁을 반대하다가 반혁명범으로 몰려 중국 감옥에 갇혔다. 12년 후 출소하니 문화대혁명이 일었다. 그는 우파지식인으로 분류돼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모택동의 홍위병들을 피하고자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다. 다시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문화혁명은 모택동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 계급투쟁이었다. 모택동은 그 힘을 빌려 중국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개인사에 새겨진 민족의 수난사

신철의 삶은 대별하여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한국사를 온몸으로 감내한 역사적 인물의 삶이었다면, 후반부는 탈북자들을 도우며 교회를 섬긴 신앙인의 삶이었다. 신철의 삶 전체를 관통한 이념은 오직 기독교 신앙이었다. 일본의 압제, 동족상잔의 비극, 문화대혁명의 광기로부터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신앙이었다. 개인의 몸으로 역사의 횡포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화혁명을 이긴 한국인 신철>은 역사서로도 읽히고 신앙서로도 읽힌다. 기독교 역사학자 박정신 교수(숭실대학교)는 추천사에서 “신철의 역사, 신철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썼다. 신철의 삶에는 해방과 분단의 한국사가 새겨져 있다. 동시에 그 어떤 권력에도 굴종하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도 새겨져 있다.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신철은 남쪽으로도 북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는 중국 요녕성 왜두산에서 교회를 섬기며 여생을 보냈다. 지도를 펼쳐보니 왜두산과 한반도는 압록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걸어서라도 저벅저벅 건너갈 거리다. 신철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남의 땅에서 탈북자들과 식량난에 굶주린 어린아이들을 돌보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역사의 중심부 인물로서 출세를 바라지 않았다. 인도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동족상잔의 소용돌이로 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무기력한 자신을 채찍질하며 여생동안 참회를 빈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 후기에는 신철의 입으로 밝히지 않은 사건 하나가 담겼다. 신철이 동생 신상철의 묘를 찾아갔던 일이다. 그는 건륭황제의 정계비를 찾다가 백두산 자락에서 길을 잃어 북한 땅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다. 북한 군인에게 붙잡혀 신문을 받는데, 거기서 친분을 맺게 된 사령관의 배려로 동생의 묘를 찾게 되었다. 사령관이 직접 차에 태우고 평양까지 가서 묘지로 안내했다고 한다. 동생의 묘 앞에 선 신철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만약 신철의 삶이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삶이었다면 신철과 동생이 죽어서라도 재회한 일은 한반도의 미래를 희망차게 예견케 하는 사건이다. 한 핏줄로 태어나, 적군으로 마주하여,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끝내 다시 만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상철의 묘를 보러가는 일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지금은 분단을 기억하는 세대의 시대가 아닌 일상조차 힘겨운 세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에게 신철의 삶을 소개하는 건 전설 속 유물을 소환하는 것처럼 아득한 일에 불과할지 모른다. 신철은 왜두산 자락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민족자체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오늘 우리에게 ‘거대한 역사의 횡포를 거스르지 말라. 그대들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직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다. 우리 힘으로 일어설 수 있다’고 항변하고 싶어진다.

70년이 훌쩍 지났다. 올해도 광화문 광장에서는 해방과 분단이 같은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올해도 광화문 광장에서는 해방과 분단이 같은 말로 쓰이고 있다. 당분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광장 속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 기괴한 언어의 조합을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진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민족자체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인가.

* 저자소개

지은이 류연산은 1957년 중국 길림성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 출생으로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 학원 교수와 전국 소수민족문학연구회 이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인류속의 우리 민족』이 있고, 그 이외에 역사 기행문 『만주 아리랑』, 고구려 문화유산 답사기 『고구려 가는 길』 등 소설 수필 분야에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민혁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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