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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불시착’과 북한 장마당 이야기

기사승인 2020.03.09  09: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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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불시착’과 내가 경험한 북한(3)

‘사불’(사랑의 불시착) 드라마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먼 나라의 이야기, 들여다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곳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리라.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으나 유일하게 갈 수 없는 ‘가장 먼 나라’ 북한! 그런 북한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기에 성공했을 것이다. 군관 사택이라는 특정마을 배경이기는 하나 북한마을의 풍경을 가장 근접하게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존에 나왔던 북한 배경의 어떤 영화들보다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해내는 배우들의 북한사투리와 억양,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장마당의 풍경... 요소요소에서 시청자들은 북한을 만났다. 흥분할 만한 드라마였다.

 

한류의 현장! 통일의 현장 북한장마당 이야기!

북한의 ‘한류’열풍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이번 ‘사불’ 드라마에서 짚어볼 수 있는 ‘한류’ 포인트는 두 꼭지로 압축된다. 한국드라마를 즐겨 보던 김주먹 씨의 역할과 장마당의 숨겨진 보물 ‘한국산 상품’이 그것이다. 김주먹 씨는 한국드라마를 많이 본 덕에 본의 아니게 남조선 출신 윤세리와 군인동료들 중간에서 통역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서로 다른 남북언어와 놓칠 수 있는 문화차이를 해박하게 설명해주는 감초역할을 한 것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해보자. 북한에서는 언제부터 ‘한류’가 생긴 것일까? 여기서 나의 경험담을 나누려고 한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이야기다. 1997년에 첫 탈북을 했던 나는 중국의 한 도시에서 한국교포들이 운영하는 도매시장에 취직되어 일을 했다. 한국산 면 내복을 파는 가게에 취직했던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화려하고 좋은 상품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호텔 1층 전체가 모두 한국산 상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소매보다는 대부분 도매로 판매되었다.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중국의 각처에서 사장님들이 몰려와 물건을 사가느라 호텔이 시끌벅적했다. 중국말을 거의 못했던 나는 다른 직원들이 500-600원의 월급을 받을 때 300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300원이면 용돈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틈만 나면 한 바퀴씩 돌면서 아이쇼핑을 했던 나는 월급을 타면 어떤 걸 살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고 싶은 것이 많은데 비해 월급이 턱없이 적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첫 월급을 받은 날 나는 200원이 넘는 구두를 사고 말았다. 어이없어하던 사장님의 표정도, 갖고 싶었던 신발을 샀던 기쁨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여튼 나는 북한 사람치고 ‘한류의 현장’을 일찍 체험한 편에 속할 것이다. 한국위성TV를 통해 한국드라마는 물론 음악, 패션, 음식까지 두루 섭렵하며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는 2000년 3월에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되고 말았다. 40일 중국감옥, 3개월 북한 집결소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4개월간 드라마 같은 사건들이 많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때 내가 입고 간 옷 중에 유일한 한국산 유니폼(흰색)이 한 벌 있었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모형제가 그 어려운 3년의 시간을 얼마나 악착같이 버텨냈는지 집안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얼른 어머니에게 갖고 간 한국산 추리닝을 드리면서 얘기했다. “어머니, 이거 장마당에 갖고 가서 ‘일제’라 하고 팔아보세요. 아마 지금 갖고 있는 장사밑천보다는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옷 안에 있던 라벨은 잘라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웬 일인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오셨다. 큰일이라도 난 듯이 장마당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니, 내가 그걸 들고 매대를 돌아다니면서 흥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할매가 와서는 등짝을 때리더니 귀에다 대고 ‘이거 보오~ 그거 내 남조선긴 거 다 아오. 계속 그렇게 들고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뺏기고 큰일 나오. 빨리 적당한 가격에 내게 넘기오.’라고 하는 거 있지! 내 너무 놀래서 주고 왔다.” 의류 재질만 봐도 어디 것인지 안다는 할머니의 엄포에 어머니는 적당한 가격(괜찮은 가격)에 팔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오신 것이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고향을 떠난 3년 동안 북한 장마당이 얼마나 급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한국산 화장품만 써왔던 터라 일반 화장품(대부분 중국산)을 쓸 수 없어 장마당에 나갔다. 그런데 케이스가 아무리 봐도 한국산이었다. 화장품(트윈케이크)을 들고 뚜껑을 열고 속을 봤다. 보는 순간 나는 중국산이라는 걸 눈치 챘다. 중국에서 중국산 한국산 다 써봤기 때문에 입자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이스 뒷면을 보니 역시나 중국글자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아줌마에게 가격을 물었다. 그런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당시 쌀 1㎏이 70여만 원이었는데 화장품 하나의 가격이 500원이라는 것이다. 큰 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아줌마! 이거 왜 이렇게 비싸요?” 라고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진 아줌마가 내 귀에 대고 속닥속닥 “이거 보오! 이거 남조선기요!” 라며 웃지 않는가?! 나는 이미 한국산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또 따졌다. “아니 남조선 건데 왜 다 중국글자예요?” 아줌마는 갑자기 째려보더니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디서 왔소? 이게 세관을 통과하려면 중국글자라야 통과될 게 아니오? 어디서 왔길래 이렇게 물정을 모르오?” 위아래 훑어보면서 나를 혼내고 있었다. ‘사불’드라마 장마당에 나오는 아줌마 못지않게 한국산 제품을 파는 것에 대한 긍지감이 하늘을 찔렀다. 북한에서 ‘한류’가 퍼져나가는 근원지는 단연 ‘장마당’이었다.

여튼 나는 3년간 너무 많이 바뀐 북한문화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도, 아빠 친구들도 모두 한국노래를 즐겨 들었다. 사촌동생들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등의 남한 노래를 듣고 부르며 가락에 맞춰 춤을 추며 놀았다. 아빠 친구는 아예 ‘주현미 노래’ CD를 갖고 와서는 틀어놓고 아빠랑 저녁을 즐겼다. 나는 사촌동생에게도 아빠 친구에게도 “이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시냐?”고 겁먹은 표정을 짓고 절제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하나같이 괜찮다고 요즘 다들 이러고 논다고 했다. 이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이미 남한의 제품을 모방한 물건들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문화 역시 북한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북한의 한류는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런 북한의 ‘한류’를 통해 ‘통일의 현장’을 보았다. 북향민들이 한국에 와서 정착 초기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이다. 그런 점을 생각할 때 북한주민들이 한류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미 ‘통일연습’을 하고 있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후라이까지 말라’는 하나의 문장을 통해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통일의 시작’이 아닐까?!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서로의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포인트를 두고 싶은 대목이다. 다음 호에는 ‘북한사람들의 동지애’로 이어가려고 한다.(계속)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

박예영 ote20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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