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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의 책임을 물은 획기적 판결, 이제는 획기적 외교로 풀어라

기사승인 2021.02.11  16: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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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재단 현안진단 제250호

한일관계가 꽉 막힌 지 오래다. 아베 내각이 물러나고,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종료하면서 한일관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1월 8일 12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제기한 배상 청구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원고들에게 승소를 안겨주면서, 한일관계는 다시 시계 제로 상태에 빠졌다.

 

판결의 획기적 의의

이번 판결은 국제법 발전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내용을 지니는 판결이다. 식민지 지배와 전시 하에 벌어진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판결에 대해 일본에서는 또 다시 ‘국제법 위반’을 전가의 보도로 들고 나와 한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라며 압박하고 있다. 국내 일부 언론에서도 이 판결을 ‘반일 모험’이라고 규정하고, ‘변방의 논리’라 폄하하는 논설을 내보내기도 했다.

주권면제(또는 국가면제)란 한 국가 또는 국가재산이 타국 재판소의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19세기 이후 국제관습법으로 발전되어 왔지만, 이미 19세기 초부터 제한적 면제이론에 입각해서 주권면제의 예외를 인정해 왔다. 더구나 최근 들어서는 그 예외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판결에서 재판부는 다른 구제 수단이 가로막힌 매우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피해자는 자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이 경우에 주권면제의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판결은 21세기에 들어와 이미 다수 축적되어 있다. 200년에 걸친 국제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국제법이 발전해 온 결과다. 2014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 2017년 영국 대법원 판결, 2019년 우크라이나 재판소 판결 등이 그 예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도 ‘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고 있고, ‘유엔 재판권 면제조약’을 비준하는 등 제한적 주권면제이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권면제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권력적·공법적·주권적 행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이 제한적 주권면제이론에 입각해서 이번 ‘위안부’ 재판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은 ‘위안부’ 제도 운영이 일본 국가의 공적 권력행위였음을 스스로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 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도 이번 판결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판결이 획기적이라는 것은, 동시에 이 판결로 우리의 대일외교가 지금까지 가 본 적이 없는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러설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내달릴 수도 없다. 용기도 필요하고, 신중함도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입장과 대응

이와 관련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2015년 합의가 ‘공식적 합의’였음을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피해자 할머니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을 찾기 위해 한·일 간에 협의를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는 판결 당일 우리 외교부가 밝힌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었으며, 22일에 주일한국대사로 부임한 강창일 대사도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이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대일정책을 바꿨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2015년 합의는 파기한 것 아니었느냐는 비판 또는 비난이다. 2015년 합의에 반대하며 이를 파기해 줄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가 이를 공식 합의로 인정한 데 대해 당혹감을 표출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합의를 사문화시킨 문재인 정부가 백기를 들었다며, 이제 합의 이행이 남았을 뿐이라고 압박하는 일본의 극우 언론이나, 이에 호응하듯 2015년 합의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느냐며 문재인 정부가 표변했다고 비아냥거리는 우리 안의 일부 논조는 무책임한 현실 호도이며, 전형적인 가짜 뉴스에 다름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합의를 공식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다. 2017년 12월 ‘2015년 한·일 합의에 대한 검증 TF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문재인 정부의 입장은 일관되어 있다. 2015년 합의가 한·일 정부 간 합의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피해자 중심의 접근에서 볼 때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어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는 현실의 인정이고, 다른 하나는 원칙의 천명이다. 따라서 파기와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의 성의를 기다린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2018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상대가 있는 일이고 외교적인 문제이고 앞 정부에서 공식적인 합의를 했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만족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최선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확인한 바 있다.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그동안 ‘피해자 중심 접근’의 원칙을 국내적으로 구현하는 데 노력해 왔다. 국정과제에서 위안부 문제가 여가부의 과제로 설정되어, ‘위안부’ 연구소 설립과 ‘위안부’ 기림일 제정 등을 통해 사실 규명과 위령 및 기억의 계승 등에 주력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1월 8일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최종적으로 확인되어,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라는 원칙을 국내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조심스럽게 그 무게 중심을 ‘원칙’에서 ‘현실’로 이동시키면서, 버거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대일 외교를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서려 하고 있다.

한편, 2019년 헌법재판소 판결은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 또 하나의 기준을 추가했다. 즉 2015년 합의가 비구속적 구두 합의에 불과하여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확인되는 것은, 2015년 합의는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는 정치적 합의로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결여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치적 합의에 불과한 2015년 합의에 ‘피해자 중심 접근’의 원칙을 구현하여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2015년 합의의 형식적 내용적 결함

헌법재판소가 지적했듯이, 2015년 합의는 공식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 양국 외교장관들에 의한 구두 합의에 불과하다. 구두 합의는 양자 외교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일본이 연관된 것으로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미·일 안보조약 5조 적용 여부에 대한 양국 간의 구두 합의가 있다.

이는 일본 입장에서는 사활적인 안보 문제지만 미·일 간에는 문서 없이 구두 확인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클린턴 국무장관(2011.1.), 오바마 대통령(2014.4.) 등이,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틸러슨 국무장관(2017.2.), 트럼프 대통령(2017.2.), 매티스 국방장관(2017.10.) 등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를 일본에서는 미국의 방위 공약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 법적 효력의 한계로 인해, 미국의 행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정치적 의지를 ‘구두’로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최근 바이든 당선인과 스가 총리의 첫 전화회담에서도 그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합의는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 한계를 구두 약속을 되풀이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 양쪽이 별도로 작성한 기자회견문이 있을 뿐, 합의문서가 존재하지 않는 ‘2015년 합의’도 이와 비슷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합의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가 ‘2015년 합의’의 준수를 한국 정부에 요구하려면, 아베 정부를 계승해서 스가 정부가 2015년 합의에 입각해서 그 책임을 이행할 의지가 있음을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2015년 합의’는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발견된다. 합의의 핵심 부분인 사죄와 반성 표명의 주체가 일본 국가의 공인인지 아니면 사인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 문장은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서”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이라는 공식 직함이 ‘사인(私人)’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는 주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일본 내각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2001년 8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2013년 12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은 내각총리대신의 이름으로 실시된 것이지만, 일본 내각은 이를 ‘사인’의 자격으로 참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각총리대신’의 직함이 공인이 아닌 사인의 자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회견문에 불과한 ‘2015년 합의’가 공식 합의라는 점을 우리 정부가 상기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 정부에 대해 위의 문제들이 ‘공인’ 자격으로 한 것임을 확인받아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를 확인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1월 8일의 판결이 지향하는 목표, 즉 피해자 구제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판결 이후 피해자 중심의 접근

판결 이후 이용수, 이옥선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은 ‘금전적 배상’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 ‘공식적 사죄’라고 거듭 밝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세계 시민이 모두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의 일본 총리의 공식적 사죄와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단체들이 강조하는 것도 일본 정부의 ‘사죄’다. ‘정의기억연대’는 1월 20일의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판결을 수용하여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진실을 규명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포함된 최종적 불가역적 사죄’를 할 것을 요구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자 마음에 다가서는 일본 정부의 진솔한 사과가 필요하다. 스가 총리가 공인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의 마음에 다가서는 말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여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현할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입구에 서게 된다.

 

문제 해결의 입구, 기본에 충실한 사죄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선생님이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일본은 법치국가니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내면 경찰은 필요가 없지. 잘못한 게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보상해야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걸 할게.”

일본에서 1979년에 처음 방영된 이래 2011년까지 3년에 한 번 꼴로 제작되어 국민적 인기를 얻은 학원 드라마, 「3학년 B반 긴파치(金八) 선생님」 제1화(시리즈1)에 나오는 대사다.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의구심을 불식하고 이후 서로를 끈끈한 신뢰로 이어주게 되는 이 장면은 진실한 사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실의 진솔한 인정, 반성과 사죄의 직접적인 표현, 원상복구를 위한 법적 구제의 약속, 즉각적인 행동' 등으로 구성된다. 한국 국민이 일본에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30여 년 동안 위 드라마 시리즈를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려놓은 일본인들이 사죄의 기본을 모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월 8일의 판결 이후 문제는 오히려 명확해졌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기본에 충실한 사죄를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 정부에는 일본 측의 성의를 견인하는 진정성 있는 외교를 주문한다. 1월 8일의 판결이 획기적인 만큼 우리의 외교도 획기적인 것이어야 한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국무총리실과 외교부, 여가부의 고위 관계자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동력과 이론을 제공해 온 관련 활동가, 연구자, 변호사들이 모두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고 치밀한 전략을 세워 일본의 성의를 견인하는 종합예술급 대일 외교를 펼쳐줄 것을 기대한다.

평화재단 hyeonan@pf.or.kr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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