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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평화협정] ① 1998년 벨파스트 협정

기사승인 2019.07.22  00: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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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일랜드의 유혈분쟁을 멈춘 ‘벨파스트 협정’

북아일랜드 신·구교도 사이의 유혈 분쟁을 봉합한 ‘벨파스트 협정’. 이 협정은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아일랜드공화국과 영국, 북아일랜드의 8개 정당이 참여해 맺었다. 마침 이날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날을 기념하는 성주간 금요일이었기에, ‘성금요일(Good Friday) 협정’이라고도 불린다.

영국판 광주학살로 불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동명의 영화 <Bloody Sunday> 포스터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 차별이 불러온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 내 갈등의 역사는 짧게는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아일랜드는 식민과 분단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아일랜드를 독립시키고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겨두면서, 이곳에선 친영국 성향의 신교도와 아일랜드 민족주의 성향의 구교도 간 갈등이 극심했다. 차별에 반대하는 구교도, 즉 가톨릭 평화시위대는 연일 거리를 메웠다. 그러던 중 1972년 1월 30일, 데리에서 영국 공수부대가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민간인 14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가톨릭교도들에겐 영국의 지배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식이 퍼졌고,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을 중심으로 한 무장 투쟁이 강화됐다. 얼스터의용군을 비롯한 개신교도측의 무장세력도 가만 있지 않았다. 테러는 또 다른 테러를 불러왔고, 30년 동안 3,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순탄치 않았던 협상과 치열했던 쟁점

폭력의 악순환은 1998년 4월 10일, 벨파스트 협정으로 봉합됐다. 당시 미국 정부의 특사 조지미첼 전 상원의원은 중재자로 나서 비폭력 등 6개항의 협상참가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협상이 진행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경 친영파인 민주연합당은 IRA의 무기 폐기를,  강경 민족주의파인 신페인당은 IRA 정치범 석방을 각각 협상의 선결조건으로 내걸면서 협상은 수시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BBC와의 한 인터뷰에서 미첼 전 의원은 “협정이 성사되기 전, 700일의 실패가 있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2년여의 부침 끝에 마침내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평화협정문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 담겼다. 북아일랜드의 의회와 정부 구조,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의 관계, 아일랜드공화국과 영국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였던 북아일랜드 영토 분쟁은 아일랜드공화국 헌법 2조의 개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아일랜드 섬 전체를 영토로 한다”라는 규정을 “아일랜드 섬에서 태어난 개인은 아일랜드 민족의 구성원으로 한다”라고 변경함으로써,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영국과의 통합 주장)이 느끼던 ‘흡수통일’에 대한 공포를 덜어줬다. 이는 남한의 헌법 3조와 북한의 조선노동당 규약이 양쪽에 흡수통일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일랜드 내부의 통일이냐 영국과의 통합이냐 하는 문제는 차후 북아일랜드 주민 다수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뤄야 한다는 이루어야 한다”는 헌법 3조에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 아일랜드 주민 다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새로운 단서조항을 추가했다. 그러나 무장해제 시점은 도저히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이 부분은 모호하게 처리됐다. 공식문서에는 “무장을 해제한다” 정도로 남기고, 비공식문서를 통해 이를 요구하는 통합파에 IRA가 곧 무장해제를 할 것처럼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 IRA의 무장해제는 몇 년 후에야 시작됐다.)

벨파스트 협정의 찬성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정치권과 시민사회, 언론은 대대적인 ‘YES 캠페인’을 벌였다. 사진은 아일랜드 언론 매체 <아이리쉬 미러>의 당시 표지

평화의  시대를 선택한 국민들

같은 해 5월 이 협정을 토대로 한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아일랜드 유권자의 94%, 북아일랜드 유권자의 71%가 헌법 개정에 찬성했다. 이로써 평화협정이 완성된 것이다. 사회민주노동당 존 흄과 얼스터연합당 데이비드 트림블은 해묵은 갈등을 끝냈다고, 아니 완전히 끝내라는 의미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한 조지 미첼은 1999년 유네스코 평화상과 영국이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훈장 중 하나인 대영제국 명예 기사상을 받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더 많았다. 투표 전에 “평화를 위해 당파를 넘어서자”며 간절히 호소한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종교계, 언론의 노력이 없었다면, 협정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외부의 유무형적 도움 역시 큰 힘을 발휘했다. 당시 유럽연합(EU)은 ‘북아일랜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1995년부터 2013년까지 3기에 걸쳐 12억5600만 유로를 지원했고, 미국은 ‘아일랜드국제기금’을 통해 1986년에서 2010년 사이에 8억95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끝나지 않은 평화 여정벨파스트 협정의 위기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끝난 건 아니었다. 현재도 정치적 교착 상태는 반복되고 있고, 구교도와 신교도 거주공간을 분리하는 ‘평화선’이라는 이름의 장벽 역시 다 허물지 못했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벨파스트 협정을 반대하는 그룹이 있고, 지난 4월엔 이들이 시위하는 가운데 한 기자가 총격을 받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중 영국의 브렉시트 선언은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가장 심하게 흔들고 있다. 영국이 EU를 탈퇴하게 되면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이 생기는데, 만약 통상의 물리적 국경인 하드 보더(엄격한 국경선)가 들어서면 잠복해 있던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도 간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심심찮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한 일본 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조선을 ‘일본의 아일랜드’로 비유했다. 그는 아일랜드를 모델로 조선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그의 뜻대로 일본이 조선에 자치권을 주었던들 그들의 만행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지만 평화협정을 통해 남북 아일랜드가 또 다시 한반도의 모델이 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지연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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