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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교수 “‘민족통일’로는 남북통일 불가능”

기사승인 2017.06.23  13: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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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림 연세대 교수, 한반도평화연구원(KPI) 평화포럼에서 발표

“가해사관에 대한 절대 사과와 절대 반성, 절대 참회에 대한 출발, 이게 없이는 통일도, 핵문제도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핵문제는커녕 통일에 있어 미국이나 중국, 세계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협동과정)의 말이다. 박 교수는 22일 오후 연세대에서 열린 KPI(한반도평화연구원) 평화포럼 ‘화해와 용서-트라우마 치유를 향한 마지막 여정’ 주제발표에서 “우리가 무고한 세계 인민을 무수하게 많이 죽인 가해민족이고 지금도 역시 세계 제1의 가해민족”이라며 이같이 주장했다.

22일 오후 연세대 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린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의 평화포럼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유코리아뉴스

박 교수는 “저는 화해와 용서, 트라우마 치유 같은 문제에 관심 가진 지 꽤 오래 됐고, 워낙 도발적인 문제 제기도 많이 해왔다”면서 “아직 공론화하진 않았지만 지식인들이나 정책결정자들을 뒤집어놓고 있는 문제 제기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 한국 민족, 조선 민중은 20세기 가장 큰 가해민족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 전반 독일 민족이 가해자였듯 20세기 중후반은 한국 민족이 세계 사람들을 불러들여 죽였다는 것이다.

북핵이나 사드 문제도 ‘가해자’ 관점에서 풀이했다. 박 교수는 “지금도 전세계에서 핵문제 하나 해결 못해서 핵으로 세계를 위협하고 사드를 배치하려고 전세계를 가장 큰 핵전쟁의 폭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한민족”이라며 “전쟁 위기가 가장 높은 곳도 여기고, 무기를 가장 많이 개발하는 곳도 여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회과학적으로 ‘민족통일’ 담론을 버리지 않는 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다. 그건 완전히 국제통일이고 세계통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민족통일, 민족분단이란 표현을 더 이상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지적했다.

그는 또 얼마 전 한 강연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화해와 용서의 화신이었음을 소개한 일화를 설명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관을 지어주고 그래서 박정희를 용서하고, DJP연합을 통해 산업화 세력과 연대하고, 6·25 참전자수당을 최초로 만든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랑을 하자면 참전수당을 만든 주범이 저였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DJ의 오른손엔 제주 4·3희생자에 대한 특별법이, 왼손엔 6·25 참전용사들에 대한 참전수당이 같이 갔다”며 “6·25 참전에 대해서는 원래 1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평생 빨갱이라고 공격받아온 DJ가 그 일들을 했다”고 밝혔다.

이날 주제발표에서 박 교수는 베트남 전쟁 시기 발생한 캄보디아의 대량학살(일명 ‘킬링필드’) 현장에 갔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이다. 모두 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같이 살아갈 거니까’라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그 피해 마을에서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가톨릭 선교사로 캄보디아에 있었던 프랑스와 퐁쇼는 『캄보디아 영년』이란 책에서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폭정과 학살을 고발하고 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영년(Year Zero)이란 표현은 1947년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만든 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폐허가 된 세상, 인간의 현실을 고발한 ‘독일 영년’이란 영화에서 따온 말이다.

반면, 박 교수는 1953년을 ‘영년’으로 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조인과 함께 3년 1개월 2일간 계속해 온 전쟁의 포성은 멎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어떤 한국인도 한국사회의 어떤 부분도 전쟁 전의 모습과 의식을 간직한 채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혁명적 물결이 가득하고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부푼 희망과 빠른 움직임들로 넘실대던 해방의 해인 8년 전 1945년의 상황과 좌절, 죽음, 기아와 절망, 시체와 분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만이 모든 이들의 사고와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1953년의 사회상의 차이는 이 사이 8년 동안 한국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도 남았다.”

베트남전쟁이나 한국전쟁 모두 내전이 아닌 국제전이라는 성격 규정도 분명히했다. 박 교수는 “캄보디아는 원래 내전의 역사가 전혀 없는 땅이다. 한국 역시 내전의 역사가 전혀 없는 땅이다. 서구 사람들이 제일 놀라는 게 ‘어떻게 조선 500년간 내전이 전혀 없었는가?’ 하는 점”이라며 “제가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수십 년간 논쟁일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단도 자기(미국 등 외세)가 시켜놓고 ‘한국전쟁을 내전이다’라고 하는 것은 우릴 두 번 죽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그러면서 “지극히 평화롭던 캄보디아에 프랑스,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런 학살이 있었겠는가”라며 “더욱이 키신저(헨리 키신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 국무장관)는 20세기 최악의 학살자인데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는 캄보디아를 완전히 융단폭격한다”며 “키신저는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캄보디아 학살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런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전쟁, 학살의 치유와 화해 모델로 뉘른베르크·도쿄 유형(사법 모델), 각종 민족갈등과 종교분쟁 등의 사례가 보여주는 보복유형(폭력 모델),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보여준 진실화해 교환 모델, 독일이 보여준 연합(일치)정치 모델, 홀로코스트(위안부 모델) 등을 열거한 박 교수는 “제 결론은 연합정치 모델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독일, 핀란드, 체코가 과거 청산을 할 때 처벌하지 않고, 용서하면서 상대방을 ‘우리’ 안에 끌어들였을 때 망가졌던 공동체가 회복될 수 있었다”며 “제가 북한에 대해 계속 인게이지(관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고 설명했다.

연합정치 모델에 대해 박 교수는 “그동안 최선의 모델로 여겨진 진실과화해의 교환에 그치지 않고 상처와 트라우마의 핵심 요인이었던 과거의 각종 갈등을 ‘정치적 연합=일치된 공동체 구성’을 통해 극복하고 치유한 사례”라며 “연합을 통한 전체 공동체의 복원이 치유-통일-평화로 연결된 유형으로서 가장 성공적인 경로”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경우 나치 관련 문서를 공개하고 악과 진실을 드러내 책임자를 처벌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통합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그 결과 사회와 개인치유의 융합, 그리고 그를 통한 사회의 장기안정으로 나타났다”며 “제주 4·3모델이 전체 한국과 한반도와 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깊이 가장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경로가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특별법을 통해 진상규명에 다가가려 한 제주 4·3이 가장 큰 화해 모델이라는 것이다.

제주 4.3항쟁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제주 4.3평화기념관 안에 붙은 방문객의 엽서 ⓒ유코리아뉴스
제주 4.3평화기념관 안에 붙은 수많은 방문객의 엽서들 ⓒ유코리아뉴스
제주 4.3평화기념관 ⓒ유코리아뉴스

6·25를 ‘국가를 위한 희생’(유공)으로, 4·3을 국가에 의한 희생(희생)으로 표현한 박 교수는 “이 유공과 희생을 통합하려면 더 넓은 보편적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한국 최대의 이념갈등과 학살을 노정한 제주에서의 화해를 보며 이곳보다는 훨씬 더 갈등이 적었던 한반도의 다른 모든 지방 및 남과 북은 당연히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 가장 격렬한 갈등과 학살의 현장이 화해를 하는 데 그보다 덜한 갈등을 치른 곳들이 화해를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끝으로 “저는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갈등과 상쟁을 보여온 한국사회를 향해 오랫동안 진실과 화해, 보상과 포용, 화해와 상생, 정의와 관용, 유공과 희생의 통합을 말해온 바 있다”며 “이 말의 깊은 뜻과 실천적 가치는 아직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경험에 비추어 두 대립되는 요소의 이러한 통합이 지난하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즉 국가를 위한 희생과 국가에 의한 희생을 포용하여 마침내 유공적 희생 또는 희생적 유공을 같은 동일범주로서 포함해 모든 사회적 죽음, 역사적 죽음들을 하나로 통합해내자는 것”이라며 “정녕 현실에서 이 두 범주의 통합은 분명 아직은 불가능에 가까운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앞으로도 두 대립되는 요소의 통합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로 들렸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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