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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 비판과 통일운동의 방향성 모색

기사승인 2017.02.16  1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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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소외와 고독의 문제

한국 IT산업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 아로 새겨진 민낯은 개인의 분절화와 소통의 단절로 나타났다. 세계 최고수준의 국내 성형시술 산업은 내면의 공허함과 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물질주의로 압도된 인간의 허울 좋은 상품화를 의미한다. 페이스북, 카톡 등 SNS는 시공간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지만 정작 주변인들과의 소통에는 또 다른 장애요인으로 나타난다. 한편 SNS는 개인 간 소통의 창구를 넘어 얼굴 잃은 현대인들에게 셀카의 업로드를 통하여 억눌린 자아의식을 회복하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입증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자아 정체성의 공간들은 때로는 개인 간 경쟁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현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사진촬영을 과도하게 한다는 점이다. 여행 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도 소위 말하는 “사진빨”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건과 사물이 빠르게 변화고 사라지는 것에 익숙한 나머지 스스로 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잠시조차 사물을 관조할 수 없는 매우 분주하고 여유가 없는 밀폐된 시공간 속의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내면은 더욱 더 공허해져만 가는 형국이다. 도심의 흥망성쇠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해방 이후 뼈아픈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남한과 북한사회는 아직도 “빨리빨리”와 “속도전”이라는 군사주의에 취해있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비견되는 남한의 물신주의

자유주의의 물신화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문명 대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대치시킨다. 서양인들의 우월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은 우리나라의 반공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한국의 정치지형을 안보레짐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 남한 사회의 맘모니즘은 우리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혐오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다. 북한의 일간지인 노동신문의 맨 마지막 장에는 늘 남한사회의 자살률과 실업문제, 범죄 등을 보도하며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맘모니즘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비견될 만큼의 ‘물질과 정신’의 상호대칭성으로 정의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북한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내 자신을 보는듯한 심리적 공포감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사회의 심각한 계층화, 부의 편중화, 노동의 양극화와 실업문제, 환경파괴에 대한 무감각성, 종교인들의 타락은 남한이 물신화되었다는 일련의 사실들을 잘 증명해낸다.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이뤄진 여권의 신장 그리고 성역할의 다변화는 전통적 가족의 개념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1인 가구의 급속한 증대는 편리와 효율을 추구하는 유니섹스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인간의 물신화와 상호경쟁은 인간 스스로를 계층화, 상품화시키며 나아가 인간소외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수반케 한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능력을 질적, 양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상품화, 등급화, 계층화하고 신성한 인간의 노동을 끊임없이 교환가치로 체화시킨다.

신자유주의의 무거운 그림자

얼마 전에는 70년을 버텨왔던 뉴욕제과가 문을 닫았다. 십 수 년을 버티어왔던 동네 빵집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고 모두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돈이 없어도 외상이 가능했던 동네 구멍가게와 상점들은 모두 화려한 조명을 갖춘 24시 편의점으로 대체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삼삼오오 친구들과 시장에서 먹던 재래식 떡볶이 집은 어느덧 깔끔한 현대식 인테리어와 함께 거대자본의 회오리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이러한 도심 속의 빠른 흥망성쇠는 우리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든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무한한 자유와 함께 창의성을 가져오지만 타자와 구별되는 경쟁과 차이점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중시 여기고 무엇보다 시장을 신뢰하는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자본가 체제로의 재편을 의미하고 대중들은 자본의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소비자들의 소비심리 자극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전에 휘말리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유행을 계속 생산해 가고 이는 일회용 상품의 증가와 환경의 파괴로 이어진다. 변덕스런 소비시장은 시장의 불확정성을 가져오고 이러한 현상은 노동시장의 불안정성과 함께 급격한 부의 편중을 가져오게 한다. 반면 시장과 소비경쟁에서 승리한 자본가들은 시장에서 패배한 개인과 대중들의 허영심을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들며 소유욕과 과시욕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우리 사회가 몸소 부딪히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개인의 개성과 창의를 중시 여기지만 성과에 따른 엄격한 차등과 차별을 수반하고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의 논리와 함께 경쟁 속 승자와 패자로 양분한다. 최근 우리사회의 여러 위기의 지표들 중 가장 부끄러운 수치는 바로 매일 하루 평균 47명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OECD 국가 중 12년째 부동의 자살률 1위라는 지표는 우리 한국인들의 물질과 정신의 심각한 불균형성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함에도 정작 우리사회는 아무도 이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특히 노인들의 자살률이 일반 자살률에 비해 2.5배 수준으로 압도적이다. 거대한 자본 앞에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다. 이들 자살 원인의 대부분은 가족들이나 지인들 때문에 벌어진다. 자살의 사유 또한 단순 삶의 비관이기보다는 더 이상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누가 되기 싫다는 등의 경제적 사유가 다수이다. 효율과 합리라는 명분으로 시장에서 패배하고 경쟁력이 소진된 노약자나 출산여성들은 재기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잉여인간으로 취급된다. 한국의 자살은 이를 방조하는 주변인들, 넓게는 구조적 폭력을 용인한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한국 현대사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준 세월호의 침몰은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난 기회비용과 효율이라는 명분의 물신주의 그리고 안보를 명분으로 자행되어오던 국가폭력이 낳은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현대성 극복은 절제와 가치의 창조로부터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전된 물질문명의 발전과 번영은 현대인들에게 아노미와 포스트 모더니티를 가져다주었다. 폭력과 이념과잉에서 해방된 이 시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개인의 무기력함들은 우리사회가 뿌리 깊은 맘모니즘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더욱 힘들어지고 통일운동은 머나먼 저 넘어 허공 속의 메아리로 들린다.

인간에서 물질과 정신은 동등이 중요하며 균형을 유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는 물질과 달리 무한한 확장성을 갖는다. 주관적, 심미적 가치는 물질로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가치의 공유는 무한한 파급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는 재화의 한정성으로 인하여 인간 상호간의 이익충돌과 헤게모니 다툼을 수반한다. 물질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 문제는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주의 해결이 관건인 반면, 정신문명은 진선미의 추구가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眞(진)’은 학문, ‘善(선)’ 도덕 그리고 ‘美(미)’는 예술을 통해 수양된다.

현 시대의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물질적 금욕과 절제된 생활이 필요하다.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기 못하는 이 시대, 현대인들은 물질적 소비를 줄이거나 또는 정신적 수양을 강화시켜 자아정체성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개인의 정신수양의 작업들은 금식이나 기부와 헌금 등 물질적 욕구를 제어하는 훈련도 아울러 병행해야만 한다. 한정된 재화와 달리 무한한 확산력과 공유성을 띠는 가치의 창조에도 힘써야 한다.

현대 시민운동가가 추구하는 목표와 비전들 그리고 현대 통일운동은 과거 국권이 강탈되었던 일제 독립운동보다도 어쩌면 더 험난하고 치열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타자가 아닌 스스로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신적 소양을 강화하고 다양한 가치를 창조해 냄으로써 물질과 정신의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가치의 싸움이다. 여기에 ‘문사철’로 불리는 인문학적 소양은 기본이다.

형사정책학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사기범죄의 비중은 세계에서 제일 높고 매우 지능화, 고도화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권위적인 엘리트 훈련방식에 익숙한 우리나라 교육풍토는 실력지상주의를 나았고,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범죄를 낳았다. 잘못 배운 교육과 지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영미권 중심의 한국 내 학풍은 매우 우려스럽다. 영미권의 인문학 학풍은 산업혁명 이후 물리과학에서 도입되었다. 원자의 발견과 함께 등장한 과학의 발전은 수리와 논리를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으로까지 확산시켜 버렸다. 경험론과 합리론이라는 논증방식은 기본적으로 ‘도구적 이성’과 도구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반면 유럽과 대륙계 학풍은 신의 존재에 대한 구명과 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에서 출발하고 이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연결된다.

사회통합 담론으로서의 중도론과 진보의 현대성

중도통합론에서의 중도는 중립과 다른 개념이다. 중도는 스스로를 비워놓는 ‘空(공)’의 개념이다. 대충 중간쯤 줄서며 설렁설렁 살아가는 인생과는 차이가 있다. 중도는 선택지 1,2,3번과 같은 일률선상에 놓여 진 선택사항도 아니다. 중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진보, 보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과 자신감에 기초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포용력과 자신감은 학문을 통한 인격적 수양과 진보, 보수를 비판할 수 있는 전문 분야에 대한 식견 그리고 부단한 실천에서 비롯된다.

현대인들은 인간소외와 구조적 폭력 해소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맑시즘을 극복해야 한다. 역사는 진보의 편이라는 선입견 또한 이러한 맑시즘과 유물사관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삶을 재발견 해볼 필요가 있다. 평소 고마움과 감사함을 잃고 살았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물과 공기, 가족과 삶 등에 이전과 다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시대를 초월하여 한 개인의 삶은 한결 윤택해 질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진보운동은 자조적 비관론이나 폭력성에 기초한 것이 아닌 실천과 대안제시형 운동이다. 말로만 떠드는 수사학이 아닌 철저한 자기비판과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환경론자들이나 지역마을공동체 운동가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정확히 실천해내고 있다. 물신화가 팽배한 이 시대, 시민운동가들은 근검절약을 통해 소비적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 정서적 가치와 내면의 피폐함을 막기 위해 중고물품의 재사용과 유통을 장려해야 한다. 시민운동가들은 A4지는 문서 출력시 양면인쇄하고 화환선물도 금지하고 있다.

상호의존성의 강화와 사회안전망 확보도 필요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개인과 단체 간 연대와 소통을 위한 네트워크 조직에 합류하고, 뜻과 소신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시민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자본의 위협과 폭력을 위한 협동조합 운동, 무정부주의 등 집단적 저항운동도 강화해야 한다. 교회공동체나 협동조합 모델과 같은 매우 느슨한 형태의 관계망 형성도 효과적일 수 있다. 어느 연구결과에 따르면 개인에게 꾸준히 만나고 연락하는 친구 20명 이상이 있다면 우울증도 사라지고, 자살률 또한 현저히 낮아진다고 한다. SNS를 통해 지구 반대편 멀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생일축하 전문을 보낼 수 있는 것은 현대인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문명의 혜택이다.

모두가 자유와 권리를 외칠 때 리더는 개인의 책임과 의무에 주목해야

사회 참여자로서의 자유에 따른 책임, 권리에 따른 의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익히 배워왔던 교과서적인 내용들이다. 이제는 개인에게 의무 지워지지 않은 일들을 기꺼이 해낼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우리사회에 대거 등장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소유한 권리와 혜택들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유무형적 기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상은 여러 연속선상의 일부이고 과정의 연속에 불과하다. 즉 어떤 하나의 현상과 결과는 여러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지금은 개인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던 전체주의 시대도 아니다. 모두가 자유와 권리를 바라는 이 시대, 리더는 필연 보다 나은 미래와 대의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민운동가들은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기 보다는 내 책임과 의무부터 생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통일운동 또한 부단한 노력과 아름답고 값진 실천적 헌신이 요구된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것들은 기꺼이 해내는 자들이 바로 이 시대를 선도하는 리더이다.

이장한 / 통일미래사회연구소

이장한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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