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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왜 한반도 비핵지대인가?

기사승인 2021.01.15  11: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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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152호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국의 대북정책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가장 큰 관심사는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때의 ‘전략적 인내’를 답습할 것인가의 여부이다. 일단 ‘전략적 인내’로의 회귀가 어려운 요인들은 있다. 우선 북한의 핵 능력이 오바마 행정부 때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해졌다는 달라진 현실이 존재한다. 또한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던 이명박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는 적극적인 대북 협상을 원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 조야에서도 전략적 인내에 대한 비판이 많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바이든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표방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를 답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바이든이 대선 후보 때 밝힌 대북정책 방향이 전략적 인내와 흡사하다. 전략적 인내의 핵심 도구였던 대북 제재에 대한 경직된 태도가 대표적이다.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달성에 대한 회의론 역시 오바마 행정부 때보다 더 커진 상황이어서 바이든 행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협상의 동기를 가질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아울러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만큼, 미국이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한 위협 해소보다는 북한 위협을 이유로 중국을 겨냥한 양자 동맹 및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를 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의 전망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다. 분명한 미래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그리고 내용적으로 전략적 인내로 회귀할수록 북한의 핵 능력은 강해질 것이라는 데에 있다. 북한의 핵 능력이 강해질수록 한반도 비핵화도 요원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라면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야 한다.

우선 한미 양국이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이후 가능한 빨리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임명해 한국과 긴밀한 정책 재검토와 협의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 공백기가 2021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면 한미간의 대북정책 공조에 힘이 빠질 수 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대선 국면에 접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한미 양국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2-3월로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북한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및 무너진 남북한의 신뢰 회복의 풍향계로 한미연합훈련 실시 여부를 삼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이 연합군사훈련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면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재개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한미군사훈련 실시 자제는 코로나19 방역 및 탄소 배출 감소로 기후변화 위기 대처에도 도움이 된다.

새로운 시작이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과 정책도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라는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긍정적인 조치에 걸맞게 경제제재를 하나둘씩 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공감을 통한 비핵화’라는,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한 번도 제대로 시도하지 못한 접근법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언행을 바꾸는 데에는 제재를 앞세운 강압보다 공감을 형성해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도대체 한반도 비핵화는 무엇인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필요하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한반도 비핵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주장은 다양하게 할 수 있지만,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들 사이에 합의된 정의도, 최종 상태(end state)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뿐만 아니라 화학무기와 생물무기, 그리고 모든 탄도미사일 및 이중용도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것이 비핵화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는 ‘너무 커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Too big to grasp)’이다. 반면 북한은 자신만의 비핵화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의 근원적인 해소”도 요구한다. 그런데 미국이 7천 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요구는 ‘너무 막연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것(Too vague to grasp)’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간의 동상이몽은 너무나도 크다. 비핵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절실히 요구되는 까닭이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 시야를 세계로 넓혀보면 찾을 수 있다. 현재 세계 면적의 50%가 넘는 지역이 ‘비핵무기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인데, 여기에는 중남미, 아프리카,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이 속해 있다. 여기에 포함된 국가수도 116개국에 달한다. 비핵지대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담겨 있고, 유엔 군축위원회는 1999년 비핵지대 설치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바 있는데 유엔 총회도 이를 승인했다. 또한 2009년 9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1887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비핵지대 조약들을 체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을 환영·지지하고, 지역 당사국들의 자유로운 준비에 기초하고 1999년 유엔군축위원회 지침에 따라 국제적으로 인정된 비핵지대가 세계와 지역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고 비확산체제를 강화하며 핵군축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확신을 재확인한다.”

이 결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고 바이든은 당시 부통령이었다. 그리고 바이든은 2020년 10월 22일 대선 TV토론에서 “한반도는 비핵지대가 되어야 한다(The Korean Peninsula should be a nuclear-free zone)”고 밝힌 바 있다. 이 발언이 유엔에서 권고하고 내가 아래에서 주장하는 ‘비핵무기지대’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상기한 내용을 종합해볼 때, 한반도 핵문제를 비핵지대로 문제를 풀자는 제안의 근거로는 삼을 법하다.

 

비핵지대를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로

그렇다. 존재하지도, 합의하기도 힘든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를 두고 헤맬 것이 아니라 이미 국제적으로 존재해온 비핵지대를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최종 상태로 삼으면 새로운 시작을 기약할 수 있다.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를 비핵지대로 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조약 체결을 ‘종착지’로 삼으면서, 북핵 폐기를 대북 제재 해결, 평화협정 체결, 북미수교, 군비통제 등 상응조치들과 동시적·병행적으로 모색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지대는 남북한이 “비핵지대 내” 당사자들로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5대 공식적인 핵보유국들이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비핵지대 외” 당사자들로 이 조약의 의정서를 체결하는 구도를 일컫는다. 기본적인 내용은 남북한은 핵무기를 개발·생산·보유·실험·접수를 하지 않고,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하는 것이다. 어떤가? 알쏭달쏭한 비핵화와는 달리 그 정의와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가?

한반도 비핵지대는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핵문제 해결을 추구하면서도 국제적인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이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서는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해나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협상은 철저하게 북미 중심으로 이뤄졌고 그 결과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반해 유엔은 비핵지대와 관련해 “지대 내 국가들의 자유로운 협상 결과에 기초”하고 “핵보유국을 비롯한 지대 밖의 국가들도 지지·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제법적으로 한반도 비핵지대의 지내 내 당사자들은 바로 남북한이다. 이에 따라 남북한이 비핵지대를 논의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들의 지지와 협력을 유도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5대 핵보유국들과 국제사회도 한반도 비핵지대를 적극 권장하고 지지·협력해야 한다. 특히 한반도 비핵지대 조약 의정서 체결 후보국들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대북 제재의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있기에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한반도 비핵지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면서도 핵문제 해결이 막히면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다른 문제들의 해결을 가능하게 한다.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군비 통제, 대북 제재 해결 등이 ‘동시적·병행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비핵화의 정의 및 목표 자체에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이들 문제의 진전도 가로막혀 있다.

이에 반해 비핵지대를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삼으면 이들 문제의 진전도 가능해질 수 있다. 비핵지대 프로세스와 이에 대한 상응조치들 사이의 선순환적인 조합을 만드는 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비핵지대 중심으로 ‘포괄적인’ 합의에 도달하고 북한의 핵물질 생산 시설 폐기와 대북 제재 완화를 비롯한 일부 상응조치를 맞교환하는 것을 ‘1단계’ 이행조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제약이 존재할 수는 있다. 우선 미국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핵전략에 차질을 야기할 수 있는 비핵지대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핵지대는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규범이 되어왔고 미국도 이에 동의했다. 또한 비핵지대 방식은 30년 동안 풀지 못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기에, 바이든 행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동의할지도 불확실하다. 조약 방식으로 미국의 대북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핵지대는 미국의 대북 핵위협 해소를 법적 구속력을 갖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방식보다는 우월하다. 또한 비핵지대는 북한이 주장해온 “조선반도 비핵화”와도 흡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핵지대는 김정은 정권에 실질적인 ‘최대의 압박’이 될 수 있다. 동시에 김정은에게 ‘명예로운 선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 창설은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의 유훈을 실현한다는 역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 협상, 특히 적대국들 사이의 협상에서 어느 일방이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패전국을 상대로도 달성하기 힘들다. 그래서 협상 당사자들이 만족과 불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협상안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한반도 핵문제를 비핵지대 방식으로 풀자는 제안이 이에 해당될 수 있다.

한반도 비핵지대는 아직 낯선 제안이다. 다른 나라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아직 공식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외교가에서 먼저 공론화를 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과 소통이 가능한 국가들은 이 아이디어를 북한에 전달할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미 양국이 비핵지대 방식으로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협의하고 유용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북한과의 소통에 나서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로 불린다. 비핵화 자체를 둘러싼 동상이몽이 너무나도 크고 이에 따라 제재 해결 등 상응조치들과 선순환적인 로드맵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여 국제사회에선 이미 익숙한, 그러나 한반도 핵문제 해법으론 낯선 비핵지대를 주목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선 비핵지대가 하나의 ‘노멀(normal)’이다. 한반도 핵문제 해법으로는 ‘새로운(new)’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 해법의 ‘뉴 노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소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정욱식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후반 북한의 대기근과 남한의 IMF 경제위기를 목도하고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운동과 연구를 시작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어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 서울시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쓰는 한편, 팟캐스트 '진짜안보'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비핵화의 최후』 (2018), 『핵과 인간』 (2018), 『사드의 모든 것』 (2017),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 (2008) 등이 있다.

정욱식 mail@kea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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