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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경적 대북(對北) 자세는?

기사승인 2020.07.28  08: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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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요즘 모 정당의 국회의원들은 가슴에 뭔가를 달고 있다. “규탄”이란 구호 등이 쓰인 리본이다. 그것을 보니 옛 학교 다닐 때의 일이 떠올랐다. 때마다 가슴에 구호가 적힌 리본을 달고 등교해야 했다. ‘불조심’을 비롯하여 때마다 지시에 따라 사인펜이나 볼펜 등으로 쓰기도 하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서 달기도 했다. 때마다 달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비닐커버 속에 몇 번씩 접어 여러 가지 문구가 쓰인 멀티 리본도 선보였다. 때마다 몇 번 접으면 학교에서 요구하는 표어로 바꿀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표어는 “반공”이었던 것으로 추억된다. 그러더니 반공을 넘어 “승공”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멸공”으로 진보되었던 기억이 난다.

가슴에 표어를 쓴 리본을 달다보니 어느새 그 의미는 퇴색되었고 달았느냐, 못 달았느냐가 관심사였던 것 같다. 그것 없으면 교문에서 붙잡혀 이런 저런 제재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가슴에 쓰인 그 표어의 의미는 그렇게 멀어졌다. 그리고 내 가슴에 달린 그 표어는 실제로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지 않는가.

그렇게 반공세대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역사 공부로 대학원을 마친 후 중위 계급장 달아주는 정훈장교 시험에 합격하여 군에 갔다. 80년대 군생활은 소위 의식화와 관계되었던 시절이었다. 네오마르크시즘, 해방신학, 매판자본주의 등 대학가 일부에서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내용들에 대응할 수 있는 정신교육이 많았다. 대부분 그것을 비판하는 교육자료였고 그것을 이해하든 못하든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그것을 보고하였다. 그런 군생활을 마치고 목사가 되는 길을 갔다. 한 마디로 긴 학창시절과 대학원을 마치고 무려 40개월 군생활까지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일방적인 전체주의적 교육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연륜이 쌓여가더니 점차 충격적인 남북의 변화를 겪었다. 남북정상회담으로까지 진화된 남북관계 속에 반공이나 승공보다는 평화와 통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 때 누군가는 국회에서 우리의 국시가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제명당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시절을 뛰어넘어 많이 달라진 남북관계며, 대북관 속에서 혼란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통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역을 하다 보니 금강산 관광을 비롯하여 북고성군 농업 지원 등으로 북쪽 지역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개성공단도 들어가 보고 더 나아가 개성시내로 들어가 밀가루를 내려놓기도 했다. 평양과 남포, 묘향산과 원산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남북관계가 꽉 막혀버린 최근 몇 년 동안도 어떻게 하든지 지원하는 일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대북관과 통일에 대한 의식과 자세를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은 아무리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르쳐도 이미 깊이 박힌 의식을 밀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적 벽으로 느껴진다. 성경적으로 북한이나 통일, 평화와 관련된 생각을 바르게 정립해야 하는데 교회 내부에도 이념적 편향이 자리 잡는 느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북한을 보는 관점과 평화통일에 관련된 성경적 가르침의 원칙은 무엇일까?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다. 그동안 6.25 노래에도 나오지만 북한에 대한 일반적 생각은 ‘원수’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거나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경우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어디 전쟁뿐인가? 생각도 못한 무장공비로 인해 심각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기억은 너무나 큰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원수’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별로 놀거리가 없을 때 동네 여기저기서 또는 학교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에도 이 ‘원수’가 등장했다. 그들은 무찔러야 할 대상으로서 공산당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원수’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마 5:43-44). 이것은 주님이 오셔서 갑자기 구약의 말씀을 뒤집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미 율법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레 19:18).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이웃 속에 이미 원수가 포함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입각한 바울 사도의 논리는 이렇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고 하셨다. 그러면서 결코 악으로 악을 이길 수 없으니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다(롬 12:21).

주님의 말씀에 이미 나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셨다(눅 6:35). 그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을 북한에만은 예외로 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를 선대하는 사람에게만 선대한다면 그리고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에게만 인사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도 하셨다(마 5:46-47).

이런 분명한 가르침을 성경에서 분리하거나 못 본 체 할 수는 없다. 모든 원수에 대한 자세가 그렇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원수격인 대상과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우리의 가치와 자유, 그리고 생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인도적 차원을 넘어선 그리스도인의 절대적 윤리를 따라 밥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조치와는 별도로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가지고 북한을 대하고 그 사역을 해야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평화한국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현재 대북제재 문제가 가로막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적 프로그램은 지혜롭게 펼쳐야 할 것이다.

물론 북한의 우리 형제들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쌀이나 물자를 보내는 것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 반대 논리 중 하나가 우리가 주는 쌀이나 밀가루 등이 군량미로 쓰일 수 있고 인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다. 우리가 주는 것이 쌀이든 무엇이든 인도적 차원에서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가 주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아야 한다. 물론 모니터링을 통해 확인을 하고 투명한 분배를 담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100% 전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우리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역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게 사용한 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우리가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녀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었지만 그가 잘못 사용한 부분은 철저하게 자녀의 몫인 것과 같다. 물론 같은 이치로 잘 사용하도록 교육하고 살펴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결국 자녀교육이든 대북사역이든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대북 자세를 이렇게 정리해 본다. 부디 남북 협력관계가 다시 활기를 찾기를 기대한다.

김관선/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평화통일연대 이사

김관선 sank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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