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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가족들과 첫 상봉을 하다

기사승인 2020.10.23  15: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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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암 강변선교 순례길을 따라(2)

필자는 1984년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고 11월 초에 LA 동부 소도시에서 이민교회를 개척했다. 교인은 일곱 살 난 아들과 다섯 살 된 딸 그리고 양가의 세 분 어른과 우리 부부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당당하게 미국인 교당을 월세를 내고 시작한 지 12년이 되었다. 한인이 많지 않은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130여 명이 모여서 성탄절에 칸타타 음악 예배를 드렸다.

1980년대의 이민교회 현상은 모이면 흩어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반쪽 난 교회에 안식년을 청하여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돌아와보니 우리 교회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계셨다고 믿어진다.

가난한 여행에 올림푸스 카메라를 400불에 사들고 나섰다. 그런데 이 카메라가 만주땅 선교의 첫길을 여는 여비가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서울-심양간 비행기 왕복값은 39만 5,000원이었다. 기왕에 서울까지 나왔으니 카메라를 팔아서 몇 년간의 숙제로 남았던 만주 이모님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Brm 1차 선교여행 여비로 사용된 올림프스 카메라.

서울 독립문 근방 시장에서 여행 가방을 사서 사탕, 과자를 가득히 넣었다. 사촌누이는 좋은 양복을 사서 응원을 해주었는데, 그 양복을 지금도 brm(brm은 Baek-Doo-Am Riverside Mission의 약자다) 행사 때 입는다. 이제는 김포공항에서 심양행 비행기를 타면 꿈에도 그리던 이모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서해 상공을 날아올라 대련 쪽으로 향하는데 창문으로 북한 땅이 보일까 하여 내다보기도 했다. 비행기 안은 여행객으로 만원이었고 저마다 말이 많았다. 나이가 들어보이는 할아버지 말씀이 “중국을 자주 다니는데 그 땅에 내리면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아니하면 큰 낭패를 당한다”고 하시니 은근히 겁이 났다.

일찍이 외삼촌이 며칠을 걸려 기차를 타고 압록강철교로 왕래하셨다는 그 길은 불과 한 시간 이십분 만에 나를 만주땅 심양(봉천) 도선공항에 내려놨다. 비행기 문을 나서자 나를 잠시 놀라게 하는 것은 인민제복에 제모를 쓴 중국인 안내자들이다. 그러나 공항 밖에는 평생 처음 보게 되는 이종 형제 자매들이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지방의 공산당에 속한 기관에서 일을 한다는 자매가 짚차를 준비하여 나왔다. 심양시 서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어두워지는 밤길을 일곱 시간 걸려서 누나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긴장과 피로로 파김치가 된 몸이었다. 누나는 공산당 어느 기관에 선전부장으로 일하고 있어서 이런 아파트에 살 수 있다며 자랑스러워하셨다.

방문 첫날을 보낸 누나 아파트와 누나의 모습.

그 당시 ‘죽의 장막’이라고 하면서 중공으로 불리었던 나라에 들어오니 온몸이 답답했다. 그러나 이종형제와 자매들은 너무 반가워하며 마치 보물단지라도 찾은 듯 야단법석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똑똑똑” 하고 들렸다. 그러자 “누구셔요?” 하며 누나가 문을 열었다. 나는 온갖 불안에 싸여 몸도 마음도 극도로 움츠려들 수밖에 없어 안절부절했다.

문앞에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세 여인이 “이 집에 손님이 오셨다지요?” 하면서 나를 흘려보았다. 그때 불안하면 가끔 그러했듯이 나는 갑자기 대변이 보고 싶었다. 그대로 화장실을 찾아들었다. 위생간이란 화장실은 아주 좁은 공간에 윗층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나는 큰 쇠파이프까지 있어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온갖 궁리를 하였다. 외국 사람이 방문했으니 공산당기관에서 파견한 여자들이 나를 조사하려고 온 줄로 여겼다.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 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피하여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때 가운데 앉은 여장부 같은 분이 나를 빤히 보면서 “목사님! 내일은 주일인데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셔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온몸의 긴장이 확 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누구신데?” 했더니 “이 도시에 조선족 사랑의교회 전도삽니다”라고 하였다.

주일날 생전 처음으로 교회를 찾는 형제 자매들이 있는 아담한 교회로서 200여 명이 모이는 교회당에 나가 중국땅에서 첫 예배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씀을 힘있게 은혜 중에 선포하였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몸이 아픈 성도들이 내 주위에 모여 들어 “목사님이 오셨으니 기도해 주셔요”라고 했다. 나는 정성껏 기도를 해드렸다.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쉽게 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사랑의교회 교우들.
사랑의교회 성가대 모습.

 

다섯째 날은 삼일밤(수요)예배를 비가 오는 캄캄한 밤에 시골의 영락교회에서 드렸다. 이곳은 이모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다. 다음날이 되어 이모님 내외분의 산소를 찾아 기도를 드리면서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이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삼일저녁 예배를 드렸던 영락교회 모습.

드디어 출국할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이모님이 사셨던 좁은 방에 온 가족 21명이 모여 마지막 밤 저녁식사를 즐겁게 나눴다. 그리고 경건한 심정으로 어른과 아이들에게 “내가 또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마지막 부탁을 드린다”고 하면서 준비해 갔던 <4영리> 전도지로 차분하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복음을 설명하였다.

밤은 깊어가는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교적 아이들까지도 경청을 하였다. 그때 제수씨가 자기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해서 간절하게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강조했다. “이 가운데 누구든지 먼저 예수를 하루라도 빨리 믿는 자가 성공을 할 것이다.”

친척들에게 전했던 4영리 소책자.

25년이 지난 오늘에 그들 가운데 목사님이 된 분, 북경에서 변호사를 하는 조카도 있다. 누나 한 분은 아직 쉽게 교회에 안 나오지만 대부분이 교회를 찾아 섬기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이라고 전적으로 믿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계속>

에스겔박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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