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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 전에 여성들의 판문점 방북이 있었다”여성평화단체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회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의 역할을 따로 떼어놓는 데 굳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전쟁과 분단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성 특유의 감수성 때문이기도 하다. 남성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분단 이후 진행된 최초의 남북민간교류 행사를 여성들이 뚫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이전에 여성들의 판문점 방북이 있었다!”

지난 2일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기념 행사를 공동 주최한 민화협 여성위원회, 여성평화외교포럼, 전국여성연대, 정의기억연대, 평화를만드는여성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YWCA연합회, 6.15 남측위 여성본부, NCCK 여성위원회의 ‘선언’이다.

지난 2일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기념 행사 모습. NCCK 제공
지난 2일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기념 행사 모습. NCCK 제공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1998년 6월에 있었고, 여성들이 판문점을 통과해 평양에 간 게 1992년 9월이니까 판문점을 통한 민간인 최초의 방북은 여성들이 6년 앞선 셈이다. 당시 여성들은 김일성 탄생 80주년을 기념해 건설된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이용해 최초로 평양에 간 남측 인사들이기도 하다.

앞서 남북 여성들은 일본 사회당 참의원 시미즈 스미꼬 의원의 주선으로 1991년 5월 도쿄에서 만났다. 제1차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였다. 450명이 모인 이 자리엔 남한 참석자는 여성단체연합 회장이자 국회의원이던 이우정 교수, 이효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윤정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북한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회장, 정명순 통일문제연구소 참사, 이련화 조선대외문화연락협의회 지도원 등이었다.

시미즈 의원은 히로시마 원폭일 평화집회에 참석한 이우정 교수로부터 북한동포들을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침략에 대한 사죄도 청산도 하지 않고 있는 일본인은 남한에도 북한에도 (자유롭게) 다니고 있다. 지금 일본인이 해야 할 일은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협력하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남북 여성 만남을 주선했다.

김윤옥 전 공동대표에 따르면 당시 도쿄토론회장은 여성들의 연대의 힘을 다짐하는 열의로 가득찼고, 이우정 교수가 “다음은 서울에서 모이자”고 했고 이어서 여연구 대표가 “그러면 그 다음은 평양에서 모이자”고 호응을 했다.

그렇게 해서 1991년 11월 서울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에서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가 열렸다. 당시 북한 여성 대표단은 역사상 처음으로 분단선을 넘어 서울에 왔다.

서울토론회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윤영애 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당시 토론회 재정위원장)에 따르면 7,000만원이라는 대규모 행사비용을 정부 지원 없이 자체 조달해야 했는데, 교회여성들, 기업인, 학자들, 거기다 여성노동자들의 회비까지 긁어모아 9,000만원 모금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또한 토론회 북측 참석자인 여연구 대표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딸로 아버지 무덤인 수유리 묘지에 들러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몽양 선생은 자신에 대한 암살의 기미를 느껴 두 딸을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맡겼다는 설명이다.

토론회에서는 분단극복과 통일을 향한 남북 여성들의 공감도 있었지만 반목도 드러났다. 남측 토론자였던 이경숙 숙명여대 교수는 남한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북측의 정명순 대표는 북측 연방제 통일방안의 우수성을 주장해 서로의 의견을 좁히기보다는 단절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서울토론회 내내 호텔 앞 육교 위에서는 반공보수파의 데모가 계속돼 참가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윤 전 공동대표는 회고했다.

1991년 11월 서울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에서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 모습. e영상역사관 제공

1992년 9월에 열린 평양토론회에서는 북한에서 생존한 종군위안부가 일제의 만행을 직접 증언했다. 아울러 과거사 청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남·북·일 여성들의 공동 해결과제로 채택했다. 이것은 ‘2000년 성노예전법 국제여성법정’의 성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93년 4월 도쿄에서 다시 열린 토론회는 북한의 NPT 탈퇴로 분위기는 좋지 않았지만 북측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 다음은 서울토론회 차례였지만 김영삼 정부 등장 후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토론회는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여성들의 연대활동은 이어졌고, 남북관계가 뚫린 2000년대 들어와서는 2002년 금강산, 2005년 평양에서 남북여성통일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같은 남북 여성들의 통일열망은 2015년 국제여성들의 WCD(Women Cross DMZ) 행사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미경 전 코이카 이사장(전 토론회 실행위원)은 “남북 민간의 직접 교류가 어려울 때 국제회의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한여성들의 적극적 주도 때문에 가능했다”며 “그러나 이 부분은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남북교류에 적극 나서야 할 이유에 대해 한명숙 전 국무총리(전 토론회 실행위원)는 “우리가 원하는 평화적인 통일사회, 양성 평등한 사회, 참여적인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평화를 넘어 적극적 평화가 필요하다”며 “여성이 그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 기념행사엔 북측 여성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3개월 전에 팩스를 보냈지만 회신이 없었다고 한다. 주최측은 오는 11월 국제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다. 변화된 남북 관계, 북미관계 속에서 남북의 여성들이 전쟁의 공포가 없는, 소외된 사람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함께 마음을 모으는 자리다. 주최측 관계자는 “11월 토론회엔 북측 자매들이 참석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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