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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아름다운 마을에 있었던 가물남교회(평북 선천)

기사승인 2013.07.15  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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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①

오늘부터 유관지 박사의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찾아서”는 해방 이전까지(정확하게는 6․25 전쟁 이전까지) 북한 전역에 있었던 교회들(약 2,500개 내지 3,000개로 추정)에 대해서 알아보는 코너입니다. 이 코너의 제목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우는 이야기를 적은 열왕기상 18장 가운데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왕상 18:30)라는 말씀에서 왔습니다.

수록 순서는 원칙적으로, ①평안북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 ②함경도에 있었던 장로교회→③황해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④평안남도에 있었던 장로교회→ ⑤장로교가 아닌 교회(주로 감리교회)와 경기북부․강원북부에 있었던 교회 순입니다. 그 지역 안에서는 무작위로 교회를 선정하여 올립니다.

제목이나 본문에서 교파의 이름을 따로 밝히지 않은 교회는 장로교회입니다.
(해방 이전, 북한지역에는 장로교회가 많았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그밖의 교파 비율을 대개 7:2:1,로 봅니다.).

한 교회가 여러 이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예: 중앙감리교회는 진남포감리교회라고도 했고, 비석리감리교회라고도 했음), 장로교는 “1938년 장로교 주소록”을, 감리교는 “1938년 감리교 재산목록”에 있는 이름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그 교회의 다른 이름들은 내용 가운데에서 소개했습니다.

소개내용은 ①그 교회가 있었던 지역에 대한 소개 ②설립연도와 설립배경 ③역대담임자④그 교회가 한 일, 그 교회와 관련된 일들 ⑤그 교회가 있었던 곳들의 현재 행정구역(지금 그 교회가 있었던 곳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⑥기타 등입니다.

소개된 내용 가운데 수정이 필요한 것이 있거나, 보충하고 싶은 것, 관련 자료가 있으면 서슴지말고 연락을 주시면 최대한으로 반영하겠습니다.

가물남(嘉物南)교회(평북 선천)

해방 전에 북한 지역에 있었던 교회들의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면 제일 앞에 나오는 교회가 바로 가물남교회이다. 가물남교회는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水淸面) 가물남동에 있었는데, 동리 이름을 따서 교회 이름이 가물남교회라고 하였다(예전에는 교회 이름을 대개 동리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이 관례였다.).
가물남동은 “만물이 아름다운, 살기 좋은 남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 구글어스로 본 평안북도 선천군 위치와 선천군 관내 모습.

선천과 양전백 목사

가물남교회가 있었던 선천은 교회가 많았고, 그 교회들이 많은 일을 했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이라는 잡지가 “선천은 기독교국”이라고 소개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선천에는 의주와 평양의 기독교인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미 북장로회의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가 1897년부터 선천에 주재하면서 선교활동을 했고, 이어 선천에 선교기지(mission station)가 설치되었다.

선천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 때문에 일본 당국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방 뒤에는 공산정권으로부터 역시 많은 박해를 받았다. 선천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선천의 교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양전백(梁甸伯) 목사이다. 양전백 목사는 평북 의주에서 출생해서 구성에서 성장했는데, 1907년에 한국장로교 최초로 안수를 받은 장로교 7인 목사 가운데 한 분이다. 양전백 목사는 1909년에 선천북교회에 부임하여 25년간 시무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양전백 목사는 1911년에 105인 사건(일본이 서북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다수였다.)으로 옥고를 겪었다. 양 목사는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다시 옥고를 겪었다.

순교자 이성주 목사

가물남교회는 선천읍교회에 출석하던 정용경(鄭用儆) 부인, 박신원(朴信元)등 교인들이 1905년에 세웠다. 초기에는 계리영(桂利榮) 목사가 가물남교회를 담임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계 목사는 만세운동을 지도했다는 죄목으로 일제의 미움을 받아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그 뒤에 이창호(李昌浩) 조사, 백영삼(白泳三) 조사 등이 교회를 돌보다가, 1921년 3월에 최희준(崔熙俊) 목사가 부임했다.

해방 후에는 이성주(李聖柱) 목사가 가물남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셨다. 평남 안주 출신인 이성주 목사는 평양숭실전문학교를 개교 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었고, 재능이 많은 분이었다. 이성주 목사는 숭실을 졸업한 후 강계의 영실학교와 선천상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42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45년에 졸업하고 가물남교회에 부임하였다.

공산정권이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놓고 여기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들을 심하게 핍박할 때, 이성주 목사는 끝까지 가입을 거부하여 결국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6․25 때 국군과 UN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자 다급해진 공산정권은 교화소, 수용소 등에 가뒀던 애국지사들과 기독교인들, 반공인사들을 집단학살했는데 이성주 목사도 백현동 광산에서 순교당했다. 이 때 가물남교회의 차유전(車輶轉)장로, 차두승(車斗昇) 장로가 함께 순교했다.

이성주 목사의 동생인 이성호(李聖號) 목사는 6․25 때 남한으로 내려와서 부산에 ‘선천교회’라는 이름의 피난민교회를 설립해서 목회하다가 혜문사를 세워 문서선교운동에 힘썼다.

차희선 장로, 신흥교회, 통화동평교회

가물남교회의 장로들 가운데 차희선(車熙善)이 있다. 차희선은 선천 신성학교 재학시절에 앞에서 말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겪었다. 차희선 장로는 해방 후 월남하여 용산에 있는 신흥교회를 섬기다가 1972년에 하늘나라로 갔다.

   
▲ 차피득 장로가 그리운 모교회 가물남교회를 재건하는 마음으로 세운 통화동평교회. 사진 출처: 국민일보

신흥교회는 평북 선천과 철산에서 피난 온 성도들이 세운 교회인데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평북교회라고 했다. 차희선 장로의 아들인 차피득(‘피득’은 ‘베드로’를 한자로 적은 것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흥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했다.

차피득은 인쇄용 필름을 생산하는 한국필름회사를 운영하면서 사회참여 활동도 활발하게 해 오고 있다.
차피득 장로가 1990년대 중반에 중국 통화현(通化縣)을 방문했는데 그곳의 풍경이 가물남과 비슷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새롭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곳에 동평교회가 있었는데 마구간 비슷한 공간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차피득 장로는 동평교회를 돕는 것이 가물남교회가 재건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신흥교회와 협의해서 150평 규모의 2층 건물을 지었다.

   
 

가물남교회의 당시 주소는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동 95번지였는데, 이곳은 지금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리가 되어 있다. 가물남동은 선천군의 서부의 중앙지역이었는데 지금 수청리는 선천군의 서북부 변두리 지역이 되었다. 북한이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선천군을 둘로 나눠 북부를 동림군(東林郡)으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유관지 목사. Ph. D. 연세대와 호서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극동방송 이사, 주옥감리교회, 목양감리교회 담임 역임. ‘평화통일과 북한선교’ ‘북한의 종교실태’ ‘기도가 흐르는 3천3백80리 강물’ 공저자. 현 북한교회연구원 원장.

유관지 yookj44@hanmail.net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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