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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교회의 역할

기사승인 2019.07.11  10: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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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0일 오후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북미 정상회담은 냉전시대 최후를 확인시킨 늦깎이 퍼포먼스였다. 1992년 아버지 부시와 2000년 클린턴과도 적대적 북미관계 청산의 기회가 있었지만 2019년에 와서야 트럼프가 주역을 맡았다. 1989년 12월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몰타에서 탈냉전 선언을 한 이후 30년 만이다.

1992년 1월 북의 김용순 국제담당 비서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하지 않는 국교 수립을 제안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미국은 곧 사라질 정권과 수교 협상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북은 이후 체제 보장을 우려하며 핵 카드를 꺼내들었다. 1993년 핵확산방지협약(NPT)을 탈퇴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초래됐던 것이다.

소련이 천연가스 공급에 대해 물물교환 방식이 아닌 경화(硬貨)결제를 요구하면서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전력 생산을 위한 원자로 건설이 필요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제1차 북핵 위기 타결을 위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함경남도 금호지구 신포에 원전을 건설해주기로 했었다. 무기 생산용이 아닌 발전용 원전으로 외부에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 EU가 비용을 감당하고 원전 완성 전까지 미국은 중유 50만t(연간)을 제공하기로 했었다. 1998년 미국발 핵 개발 의혹이 불거지지 않았더라면(금창리 핵 의혹), 계획대로 2003년에 원전이 완성됐더라면 진즉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수교도 이루어졌을 법하다.

우호가격에 의한 물물교환을 이어왔던 북한으로서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자연 재해가 몰아닥쳐 식량 위기까지 겪게 됐다. 30~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아사했다. 동서독은 통합됐고 우리는 소련에 이어 중국과도 수교했다. 북한은 온 나라가 똘똘 뭉쳐 ‘고난의 행군’에 나섰고 내부를 개혁하면서 김일성 주석 사후로도 25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거침없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이어갔고 2017년 11월에는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하노이 회담 이후 지난 4월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인민대중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인민을 위한 경제건설 총노선을 재확인했다. 북은 핵 보유와 제재보다 폐기 이후 경제발전에 목말라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북의 선의가 아닌 조건 형성이 관건이다. 미국이 체제를 보장하고 국제사회에서 제재를 풀면 북으로서는 더 이상 국제사회 천덕꾸러기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핵 협상에서 어렵게 합의를 해놓고도 해결하지 못한 데에는 북에 대한 신뢰 문제가 크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제3차 북미 회담을 기점으로 반환점을 돌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발전 역사 상 카이로스로 기록될 또 하나의 때를 앞두고 있다. 역사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간직한 한국교회라면 실기(失期)하지 않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통치가 오늘날 한반도 상에 임하고 있음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성경의 가르침 대로 북한 동포들을 믿음의 형제·자매로 끌어안고 용서와 화해의 선구자로 나서야 할 때이다.

윤은주/ 북한학 박사, 평화통일연대 사무총장

*이 글은 <기독교연합신문>에도 게재됐습니다.

윤은주 ejwarrior@hanmail.net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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