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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품은 어느 선교사의 말, “대가지불 없인 평화 오지 않아”

기사승인 2019.06.05  0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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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코리아 주최 2019 일본 통일비전트립(2019. 5. 31~6. 3) 참가기③

지난달 28일 발생한 도쿄 인근 가와사키 지역의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자이니치의 소행이라는 루머가 일본 우익세력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 자이니치(在日), 즉 한국 또는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들이 또 한 번 혐오의 표적이 된 것이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와 언론은 ‘조선인이 방화를 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조선인 학살을 부추겼다. 국가적 혼란과 위기를 모면하려고 조선인을 희생양 삼은 것. 마치 이를 대 잇듯 일본의 우익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2016년 4월 구마모토 지진, 2016년 7월 사가미하라 장애인시설 살상사건 등 참사가 있을 때마다 거짓 날조를 반복하고 있다. 그 속에서 재일동포들의 삶이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일본 지바현에 있는 관동대지진 희생자 위령비.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이 건립한 최초의 추모비로 1947년 3.1운동 기념일에 후나바시 혼조 재일본조선인연맹 지바현 본부가 세웠다. 1963년 혼조 지역에서 지금의 마고메 묘원으로 이전되었다. 비문에는 “당시 야마모토 군벌 내각은 계엄령을 시행하고,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공모하여 폭동을 계획 중이라는 근거 없는 말로 재향군인과 어리석은 주민들을 선동, 교사해 사회주의자와 우리 동포를 학살했다”라고 적혀 있다. ⓒ유코리아뉴스

2019 뉴코리아 통일비전트립 일정(5월 31일-6월 3일) 가운데 만난 임엘리야, 임사라 선교사 부부는 일본 사회에서 ‘이방인 중의 이방인’인 재일조선인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애초엔 일본인을 대상으로만 선교하다가 우연히 딸의 친구를 통해 조선‘적’ 동포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그들을 함께 품게 됐다. 당시 부부는 재일조선인이 당하는 차별대우와 억압적인 상황을 풀어야만 일본선교, 통일선교가 가능하리라 확신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총련 소속의 조선학교에 세 자녀를 입학시켰다. 당시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조선학교에 다니려면 1달에 30만 원 이상 학비가 들었다. 수입이 120만원 남짓이었던 이들에게 세 자녀 몫의 100만원 가까운 학비는 상당한 부담이었을 터. 임엘리야 선교사는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조선학교는 해방 직후 재일동포들이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국어강습소로 출발했다. 우리말을 가르치고자 한 데는 ‘언어는 민족의 정신’이라는 사상도 한몫했지만, 전쟁이 끝났으니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란 희망과 기대가 깔려 있었다. 1946년 재일본조선인련맹의 운영 하에 ‘학교’ 형태를 갖추게 된 조선학교는 교육과정을 초, 중, 청년학급제로 구분하고, 조선말과 글,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학생 수가 줄면서, 지금은 초·중학급, 중·고학급으로 통합되고 있는 추세) 그러나 학교의 앞날은 단순하거나, 순탄하지 않았다. 1948년 일본 정부는 ‘조선 아이들도 일본 교육법에 따르는 학교에서 일본어로 하는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내세워 조선학교를 강제 폐쇄하려 들었다. 이후에도 북한의 교육원조비가 쓰인다는 이유로, 한일위안부에 대한 역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시시때때 학교를 탄압했다. 2010년부터는 아예 조선학교를 일본 정부의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배제시켰다. 지난 2월엔 유엔아동권리위원회 등 유엔 기구들까지 나서 다른 외국인 학교처럼 조선학교도 지원해야 하며 차별하지 말 것을 권고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정부의 교육지원금을 끊는 것만 아니라, 조선학교에 대한 후원금을 기부금 공제에서 제외함으로써 동포사회의 후원마저 위축시키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많은 조선학교가 문을 닫기도 했지만, 끝까지 학교를 지키려는 동포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그 덕에 해외동포들이 세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말을 잊어가는 흐름과 달리 재일조선인들은 3세, 4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과 글이 유창하다.

여기엔 조선학교 교사들의 헌신도 큰 몫을 차지한다. 주로 조선학교 출신인 이들은 우리나라 최저임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으면서도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다. 연차가 쌓여 급여가 올라가면 학교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퇴직 후 생업을 위해 다른 일을 찾기도 한다. 오랜 동안 교사를 하다 물러나 화물기사가 된 재일동포 2세 김재일 씨(가명)도 그런 경우. 그는 부모가 남한 출신이었지만, 한글을 배우기 위해 4학년 때부터 조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졸업 후엔 직접 교사가 되어 음악을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남한의 노래도 함께 싣기 위해 노력했다고. 조선학교의 교사들은 “학교를 지키는 것이 통일운동”이라고 한다. 강한 민족 정체성과 평화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진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 같은 교사들의 분투 속에서 일부 조선학교 학생들은 그림편지를 통해 남북한, 해외동포 아이들과 서로의 작품에 대한 감상평을 나누며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도쿄, 평양, 서울, 연길에서 열리는 이 어린이그림전에 한국에선 어린이어깨동무가 참여하고 있다. 

지바 쉼터교회의 예배 모습. 가운데 있는 남성이 임엘리야 선교사이다. ⓒ유코리아뉴스 

지난 2일 임엘리야 선교사는 지바 쉼터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듯, 우리도 ‘대가지불’을 해야 합니다. 대가지불해야 한다는 각오가 없으면 두려움이 생겨서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는 시간과 물질, 몸을 대가지불해야 은혜를 누릴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이 돌아간다고 말했다. 평화도 그렇다. 아무런 노력이나 치르는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이 아닌 책임감으로 평화를 위한 대가지불을 감당해야 할 때다. 

정지연/ 유코리아뉴스 기자

정지연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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