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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진짜 오르막은 이제부터” -4.27 판문점선언 1주년에 즈음하여

기사승인 2019.04.25  13: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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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현안 진단’

2019년에도 한반도엔 봄이 왔지만 1년 전 2018년에 맞이했던 봄처럼 따사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대와 달리 남북관계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연일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소식이 끊이지 않았던 2017년 이전을 떠올리면 지금의 봄이 따뜻하지 않다는 말은 언감생심이다. 어려웠던 시절 생각은 못하고 희망과 욕심이 큰 탓인지도 모른다. ‘판문점 선언’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소중한 선물이었다.

1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11년 만에 열리는 정상회담을 위해서 북한 최고지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우리 측 지역(판문점)으로 왔다. 남북 정상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 남북을 오가는 모습과 도보다리 환담 장면이 전한 전율과 감동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양 정상은 판문점에서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천명하고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해소,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나갈 것에 대해 합의했다. 그날의 합의를 이행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남북관계 발전이 가속화 되고 한반도에 실질적인 평화가 정착되었다. ‘판문점 선언’ 이후 1년은 남북간 맺은 약속을 이행해 나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분단 이래 단 두 번밖에 열리지 않았던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 선언’ 이후 두 차례나 더 열렸다. 2018년에만 정상간의 만남이 세 차례나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남북 정상간 소통이 한 차원 도약하고 신뢰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상간 합의사항 이행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분야별 남북회담이 진행되었고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소해 상시협의체계를 마련해 남북관계 제도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사회, 문화, 체육, 역사, 보건의료, 종교, 언론 등 다양한 문야의 교류협력과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통해 남북화해와 동질성 회복을 위한 토대를 다지고 철도·도로 연결, 한강하구 공동 이용 추진으로 한반도 공동번영의 기틀도 마련할 수 있었다.

1년 사이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싱가포르/하노이)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놀라운 일이다. 남북 정상의 만남이 남북관계 복원과 정상화를 넘어 비핵화 협상과 북미관계 정상화 과정을 추동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판문점 선언’ 3조에 명시된 것처럼 남북관계는 이제 더 이상 북핵문제와 북미관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는 길라잡이이다. 남북관계 발전은 북미관계를 뒷받침하면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과 비핵화를 여는 열쇠와 같다.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두 번째 정상회담은 평범한 일상처럼 이루어졌지만 위기에 놓인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다시 개최할 수 있게끔 했다. 비록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관계 발전이 북미간 협상 동력을 유지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버팀목임엔 틀림없다.

평양에서의 세 번째 만남에서는 ‘판문점 선언’을 이행하여 남북관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로 진전시켜 나가기 위한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특히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하고 우발적 충돌 방지와 DMZ 평화지대화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이행한 것은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1년간 남북관계 최고의 성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완충구역이 생기고 상호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다. 근접한 11개의 GP(감시초소)가 우선 철거되었고, JSA(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비무장화하였다.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해 지뢰를 제거하고 도로를 연결하며 남북한 군인이 만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항상 뒷전으로 밀려 있던 남북군사문제를 먼저 해결해 군사적 위협과 전쟁의 위험을 종식시키고 사실상 종전수준의 남북관계를 확보했다. 남북한 주민의 삶에 평화를 일상화함으로써 남북관계가 되돌릴 수 없는 평화의 시대라는 역사적 이정표를 그린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판문점 선언 이후 1년 동안 가장 큰 변화의 중심엔 북한이 있다. 2017년 11월 29일 화성 15형 발사 이후 북한은 더 이상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고 있다. 판문점 선언 직전인 지난해 4월 20일, 북한은 병진 노선을 내려놓고 경제건설에 매진하는 새로운 전략노선을 선택하면서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선언했다. 5월 24일에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했다.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남북정상은 비핵화 방침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평양 공동선언에 동창리 엔진시험장 폐기와 영변 핵시설 폐기를 담았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최초로 북한의 5.1경기장에서 평양시민들에게 직접 한반도를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겠다고 연설한 것 역시 북한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와 하노이로 두 번이나 간 것만으로도 북한이 변화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판문점 선언’은 북한이 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북한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속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지금의 상황은 남북관계마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남과 북의 사람들이 만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평양 시내를 거닐고 있다. 우려와 달리 한미연합훈련 중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안보태세는 문제없이 유지되고 있다. 고성 지역의 비무장지대(DMZ) 내 평화 둘레길이 열려 판문점 선언 꼭 1년만인 4월 27일부터 일반 국민에게 개방된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평화가 일상화되었다. 판문점 선언의 생명력은 그리 쉽게 약해지지 않는다.

우리 속담 중에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단련이 되어 더 강해진다는 뜻이다. 쉼 없이 내달릴 것만 같았던 남북관계가 경사가 심한 오르막 앞에 다다랐다. 먼 길을 떠나오며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닐 것이다. 이미 지난 1년 동안에도 수많은 장애물을 넘고 오르막을 올랐다. 그러나 진짜 오르막은 지금부터이다. 오르막에 오르기 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판문점 선언 3개조 13개항과 평양공동선언 6개조 14개항의 약속이 얼마나 이행되었고 또 이행하려 노력해 왔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제재국면에서 남북한 군사분야 합의사항을 중심으로 차질 없이 이행해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남북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노이 이후 남북관계마저 부침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특사방북이나 원포인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을 다시 대화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것도 유용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북미간 비핵화 협상이 더딤으로써 미국 내 대북강경파 득세와 국내 이념적 정치공세가 증가하고 있는 점에 국제사회의 협력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벤트성 해법과 단기적 치유법에는 한계가 있다. 남북관계가 먼 길이라면 정치적 고민을 앞세워 가시적인 성과에 연연하거나 급급할 필요는 없다. 보다 근본적으로 북한의 변화와 선택을 염두에 두고 남북관계의 자율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노력과 함께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4월 27일 판문점 선언 이전과 이후의 남북관계가 달라졌다면 이제는 판문점 선언 1주년을 기점으로 또 한 번 달라지고 진화해야 한다.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1년간 하고자 하는 기대와 희망이 앞섰다면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을 계획하고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적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는 것 역시 지난 1년간 하겠다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3.1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남북이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 ‘신(新) 한반도 체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북관계를 우선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통일각 2차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관계는 이제부터가 진짜 오르막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오르막은 조금 힘들어도 남북이 어렵게 잡은 손 놓지 않고 분단 않을 용기를 가진다면 너끈히 오를 수 있는 오르막이다. 아무리 어려운 오르막이라도 남과 북이 함께 하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김동엽 dykim@kyung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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