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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개혁개방, 왜 베트남식 모델인가?

기사승인 2019.03.19  17: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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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연대 ‘평화 칼럼’

지난달 미국과 북한 두 정상의 베트남 하노이 회동 결과는 결실을 훗날로 미룬 채 한반도의 미래는 또 안개 속에 놓이게 되었다. 대화의 모멘텀을 마련해 북미와 남북의 정상들이 다시 만나 한반도 평화의 이정표를 빠른 시일 안에 세울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불원간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질 북한의 개혁개방을 앞두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북한이 개방을 한다면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지난해 6월의 제1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지인 싱가포르식이 될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혈맹인 중국식이 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번 하노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베트남식 경제모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필자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 베트남 호치민시(구 사이공)에 머물면서 도이머이(Doi Moi, 쇄신) 정책 이후, 빈곤과 고립을 탈피하고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베트남의 변화상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지금은 북향민(탈북민)과 함께하며 북향민을 통한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만드는 일에 적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다.

1975년 무력으로 남부 베트남을 점령함으로써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 공산당은, 통일 직후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길들어 있던 남부 베트남 인민들을 상대로 강도 높은 정치학습을 실시했다. 실질적인 경제생산 활동보다는 사상교육에 몰입한 결과 인민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고 분단시기 세계 3위의 쌀 수출국이던 베트남은 농업생산량이 격감하여 자급자족을 할 물량마저도 부족하여 인근의 태국 등지에서 쌀을 수입해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주력 산업인 농업이 이 지경이니 다른 제조업 등의 상황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익숙해 있던 남쪽의 주민들 가운데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북쪽 공산세력 주도의 통일을 반대해 조각배에 몸을 싣고 남지나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는 이름으로 북미, 호주, 유럽 등을 향해 정처없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통일을 이루고 사상혁명을 달성하면 ‘부국강병’의 나라를 건설할 줄 알았던 공산당 지도부는 10년여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1986년 뒤늦게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인식, 도이머이( 쇄신)정책을 표방하고 개혁개방의 길에 나섬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여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서방의 어느 자본주의 국가도 다 쓰러져가는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에 위험부담을 안고 투자를 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내걸었던 개혁개방의 슬로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금방 파탄이 나 무너질 것 같았던 베트남 경제는 오히려 2-3년 시간이 경과하면서 미세하나마 긍정적인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외국자본은 투자를 철저히 외면했고, 남부 자본가들이 재산을 전부 싸들고 해외로 도피한 이후, 자체적으로 조달할 국내자본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트피플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비록 조국을 떠나왔어도 고향에는 그들의 부모, 형제, 친척들이 남아 있었고, 어려움에 처한 가족의 처지를 전해들은 그들은 외국 생활에서 힘겹게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소득에서 가족들을 위해 푼돈이지만 송금을 시작했다. 마치 지금 남한에 와 있는 북향민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먹을 것, 입을 것을 아껴가며 얼마간의 돈을 보내듯이 말이다.

해외의 보트피플이 보내준 소액의 생계비를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으로 당장 필요한 식량을 구입해 연명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들은 그 돈이 자신의 혈육들이 낯선 외국 땅에서 피땀 흘려 벌어들인 고귀한 자금임을 자각하고, 그 돈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그 돈으로 도회지에서 담배 노점상이나 구두닦이를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헌 재봉틀을 사서 집 근처에서 옷 수선점을 차리기도 했다. 즉 단순한 생계 위주의 소비생활에서 상업 활동을 통해 재생산의 의미를 가미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100-200달러를 송금하는 이러한 적은 변화는 규모면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것이 없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풀뿌리 경제를 다시 소생시키는 데 있어서 괄목할 변화를 이끌어냈고, 사상적으로 억압되어 있던 베트남 사회는 쇄신정책의 진행으로 조금은 숨 쉴 공간을 찾으면서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은 그 후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되는 임가공업종(가방, 봉재, 신발 등)을 중심으로 한 외국자본의 초기 투자에 결정적 유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베트남 정부의 간곡한 투자요청에도 불구하고 투자에 따른 위험부담을 꺼려하던 외국자본들은 1억 가까운 인구를 갖고 있고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베트남의 변화에 즈음하여, 이제는 풍부한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앞으로 확대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대응해 나갔다. 그들이 베트남 정부 또는 국영기업체들과 접촉하면서 갖가지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그토록 투자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베트남 당국이 오히려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했다. 베트남 정부 또는 공산당 간부들이 누구인가? 또한 국영기업체 간부라 해도 그들은 평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운 애국자이고 혁명전사들이다. 그들은 화포가 동원되는 전쟁터와 게릴라전에서의 전술과 전략에는 익숙하고 유능할지 몰라도, 경제전쟁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외국 투자가들이 자신들을 찾아와서 온갖 교역조건들을 제시했지만 그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해외투자는 받아야 하겠는데, 투자가들의 제안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은 국제적인 상관례나 규범은 고사하고 당장 무역실무와 용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찾아온 투자자들을 내칠 수는 없지 아니한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던 그들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그들에게도 진리였다. 그들은 해외에 나가 있는 보트피플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때 조국을 등지고 떠났던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해외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과 노하우를 조국을 위해 사용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보유하고 있는 국적을 불문하고 얼마든지 조국인 베트남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고, 여러분들이 조국에 투자를 한다면 투자금액의 다소를 불문하고 외국인 투자가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공하겠습니다.”

호주와 북미, 유럽에 나가 있던 100만이 넘는 보트피플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국의 부름에 호응했다. 그들은 공산통일 전후로 조국을 떠난 지 15-20년 만에 고향 땅을 밟고 가족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선진 서방세계에서 갈고 닦은 기술들과 습득한 지식과 경험들을 전수했다. 정부나 국영기업체의 요청에 따라 해외투자가들과의 협상에서 자문역할도 훌륭히 감당했다. 그 후 베트남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작은 용’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오늘날 아세안 지역 안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언제가 되리라고 그 시기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북한은 불원간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게 될 것이고, 그랬을 때 북한이 따르고자 하는 가장 유용한 방식의 하나는 ‘베트남식 모델’이 될 것이다. 실제로 개발 초기에 베트남은 ‘일당 독재의 중국식 모델’을 선택하되, 중국이 시행하는 각종 정책들을 약 6개월의 시차를 두고 따라가면서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에 대한 보완책을 함께 강구해 왔다. 김정일 시대부터 신의주특구를 비롯해 다각도로 개혁개방을 시도하려 했던 북한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일단의 전문가팀을 중국과 베트남에 파견하여 그들의 개발전략을 연구하고 있기에, 그들이 개발 초기에 보트피플을 어떻게 활용했고 자신들도 앞으로 북향민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는 마쳤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그것은 최근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북향민들의 재입북 및 그에 따른 체제선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베트남 보트피플의 경우 대부분이 서구 여러 나라에서 충분한 사회적 지원을 받으면서 서구 문물을 학습하고 경험한 반면, 북향민들의 경우에는 남한 사회에서 최소한도의 생계와 의료지원을 받아 생활할 뿐, 향후 북한이 개방되어 고향에 돌아갈 길이 열렸을 때 북한의 개혁개방을 선도할 만큼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북향민들이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북향민들에 대한 정착지원 정책은 표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사회체제를 일시에 부정하고 남한에 ‘흡수’되어 모든 것을 ‘우리식 자본주의’에 맞추어 가도록 하기보다는, 양쪽의 체제 중에서 장단점들을 취사선택해 보다 나은 삶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며, ‘신자본주의체제’ 아래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스스로도 차제에 그러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를 몸소 살아내는 북향민들이 이 시대 남북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요 기여가 되지 않을까?

신영욱/ 인천 예사랑선교회 대표

신영욱 youngwsh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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