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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크로노스

기사승인 2018.12.27  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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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배현주 교수

이 땅에는 쉽게 변하지 않는 경험이 있나보다. 백여 년 전 국운이 쇠하여가는 대한제국 시대 의병들의 불꽃같은 모습을 담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조선은 지옥이오.’ 그녀가 만주에서 동지들에게 고한 마지막 대사는 ‘독립된 조국에서 씨 유 어게인’이다. 필자의 마음 속에 이 두 대사와 함께 엮어져서 클로즈업된 단어는 독립된 (분단)조국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뇌이는 ‘헬조선’이다. 강산이 열 번도 더 바뀐 이 장구한 세월이 무색하게도 어떤 이들에게 여전히 조국은 지옥인 셈이다. 식민지 확장을 통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는 전쟁, ‘공동체들의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숨을 쉬며 살아가는 사회를 무한이윤 추구의 장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본주의 시장, 사회적 약자들을 버젓이 비인간적 삶으로 내모는 세상은 그 어느 곳이나 잔인한 정글이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지옥 같은 공간에서 약자와 패자, 타자와 나그네가 겪는 경험은 명약관화하다.

신학자 매튜 폭스는 그리스도와 크로노스를 비교하며 미국사회와 서양 문명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크로노스를 신으로 섬긴다고 비판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크로노스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아내가 출산할 때마다 자기 아이를 삼켜버린 자이다. 크로노스는 생명 파괴자의 궁극적 전형이다. 자살 욕구에 사로잡힌 자이기도 하다. 자식을 죽이는 자는 자신을 죽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은 자식과 자신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이웃을 향한 자비와 공감의 능력을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크로노스적이다. 폭스는 전쟁과 군비경쟁이야말로 어린이들을 죽이겠다는 크로노스의 선택이라고 선언한다. 크로노스는 다음 세대가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붕괴시키고 더 나아가 다음 세대의 생명 자체를 파괴한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오고 올 세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그리스도는 나르시즘적 통제와 권력욕의 노예들과 달리 다음 세대를 자유와 사랑, 은혜와 진리, 풍성한 생명의 길로 이끈다. 그리스도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감으로써 인도한다. 우리가 추종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인가 크로노스인가?

2018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급속한 정치적 진전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논의는 전 지구촌이 유례없는 위기를 직면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개최된 제24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개막식에서 92세의 노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인류 문명 붕괴와 생태계 멸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호소하며 기후붕괴시대에 걸맞는 조속하고 효력있는 행동을 요청하였다. 한반도 평화통일 시대의 ‘번영’을 향한 로드맵이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이 되도록 하려면, 정부의 합리적 정책과 함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우선시 할 것을 우선시 하겠다는 범국민적 각성과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기후변화는 자녀를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한 얼굴이다. 지구온난화는 어린이들의 폐기능을 저하하고 호흡기 및 알레르기 질환을 유발시키는 미세먼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후붕괴 시대에 우리가 꾸는 평화통일의 꿈에는 다음 세대의 생명을 살리는 생태정의의 비전이 강물 같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

2018년 한반도에 다가온 놀라운 봄은 잡힐 듯 하면서도 쉽게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한반도의 소위 지정학적 운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감할 수 있는 계절이었다. 우리에게 이 낡은 운명을 ‘비운명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한반도 평화를 세계 평화의 지렛대로 삼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민관이 함께 집단지성을 모으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국내외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지원하며 활성화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017년 노벨평화상은 유엔핵무기철폐조약(TPNW: the 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을 통과시킨 ‘핵무기철폐국제캠페인’(ICAN: 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에게 수여되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ICAN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왔다. 핵무기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치명적 파괴력을 과시하는 크로노스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남북한 정부가 TPNW에 서명할 수 있도록 길이 열린다면, 혹은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운동이 일어난다면, 미국 같은 강대국 정부에게 도덕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 있는 세계시민사회와 세계교회, 특히 WCC의 회원교회들과 에큐메니칼 기구들에게 선도적 영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한반도 평화를 열망하는 한국인은 지구시민이자 세계시민이다. 2019년은 삼일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해이다. 백 년 전에 이미 비슷한 자각이 움텄다. 조선독립이 동양의 평화, 세계평화의 일부라는 위대한 전망을 담고 있는 ‘기미독립선언문’에 다음 세대를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그림자는 없다.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풀어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두려움을 없이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도의가 짓눌려 시든 것을 다시 살려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옳게 가꾸어 나가려면, 불쌍한 아들, 딸에게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이 길이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하려면, 우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인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세기가 바뀌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 과제가 있다.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한반도’를 만드는 과제다. 어디에서부터 회개가 시작되어야 할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해 걸어가는 대장정에 생명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양식이 되기를 기원한다.

배현주 교수

(평화통일연대 운영위원,

부산장신대학교, WCC 중앙위원)

 

 

 

 

 

 

 

 

 

 

* 이 칼럼은 평화통일연대에서 제공했습니다.

배현주 교수 61baehj@hanmail.net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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