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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주도성장론은 여전히 유효한가?

기사승인 2018.09.11  09: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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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105호

흔들리는 소득주도성장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론은 도입 초기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정부 출범 1년이 경과하면서 비판의 강도가 거세지고 있다. 보수언론이 ‘소득주도성장=최저임금인상’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비판하는 게 유행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게다가 가구별 소득분배가 악화되었다는 2018년 1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는 소득주도성장에 우호적인 진보성향의 학자들마저 움츠러들 만큼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교과서에 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원색적인 비판에서부터 잘해야 단기부양책에 불과하며 궁극적으로는 계층이동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점잖은 충고에 이르기까지 비판의 스펙트럼은 실로 다양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시도하려고 했던 거대한 전환은 실로 거대한 반격에 직면했다.

분배론인가 성장론인가?

소득주도성장은 약자에게 불리한 시장의 규칙을 바로잡고 분배 과정에 국가가 적절히 개입하여 중간층 이하 국민의 소득을 안정화시키고 상호신뢰에 기초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정책적 담론이다. 수요보다 공급을 중시하고 분배의 문제를 부차시하는 주류경제학의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이론적 시도이기도 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양적 성장보다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는 사회철학에서 비롯하지만, 여전히 ‘성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효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장만이 효율적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적 합의와 국가의 조절을 통해 성장과정의 안정성을 높이자는 경제철학을 담고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이론적으로는 이미 1980년대부터 정식화되기 시작하였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대침체를 경험하면서 소득분배의 악화가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가운데 대안적 성장론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금융위기의 발생과 그로 인한 대침체는 케인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케인스는 ‘일반이론’의 마지막 장인 ‘일반이론이 도출하는 사회철학에 대한 제언’에서 불평등과 성장에 관하여 직관적인 언급을 많이 남겼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의 두드러진 결함은 완전고용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부와 소득의 분배가 자의적이고 불평등하다는 점에 있다.” “나 자신으로서는 소득과 부의 상당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심리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 같은 큰 격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현대적 상황에서 부의 성장은, 일반적으로 상정되고 있는 바와 같이 부자의 절제에 의존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것에 의하여 저해될 가능성이 크다.” “저축은 필요 이상으로 많으며, 소비성향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소득의 재분배를 도모하는 제방안은 자본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 케인스적 사고에 기반을 둔 만큼 소득주도성장론은 소득의 형평성이 그 자체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성장에도 기여한다고 본다. 소득주도성장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어떤 정책패키지를 내놓는가와 별개로 이 두 가지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분배는 그 자체로 중요하며, 분배의 악화는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성장으로 분배를 해결하자는 패러다임이 지배하였고, 이는 결국 분배 문제를 외면하고 부차시하는 경향을 낳고 말았다. 유독 고도성장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그 결과는 심각한 노인빈곤과 초저출산이라는 부끄러운 자화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는 성장을 제약할 것이다. 우리가 겪게 될 인구의 감소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경제정책의 혹독한 대가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을 맹신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성장으로 분배를 해결하자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빠져 낙수효과와 선별복지의 논리로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물꼬를 트기 위한 전략이다. 겨우 시행 1년이 경과한 지금, 이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반면교사, 일본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국내의 비판론자들은 저성장을 극복할 대안으로 여전히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 촉구는 단골 메뉴이다. 성장이 투자에서 비롯된다는 사고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발전단계를 감안하여야 한다. 우리의 투자율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한국경제의 GDP 대비 자본축적 수준은 이미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진 상태이다. 한국은행의 국민대차대조표에 의하면, 2016년 GDP 대비 고정자산 배율은 3.3에 달한다. 이미 2010년경에 이 배율에 도달한 이후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제조업 강국인 독일과 일본도 비슷한 수준이며, 우리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선진국 가운데 우리보다 유의미하게 더 높은 배율을 가진 국가는 오스트리아 정도에 불과하다.

민간소비의 원천은 가계소득인데, 한국의 국민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국민계정으로 본 소비성향이 낮은 것은 기본적으로 가계소득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보다는 조금 높지만 주요 선진국 가운데 일본도 이 비중이 낮은 편이다. 일본과의 비교는 매우 흥미롭다. 일본은 고도성장기를 지나 성장이 둔화되는 가운데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한국은 일본을 20년 시차를 두고 따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디플레이션 과정을 반복하면서 장기침체를 겪었다. 디플레이션은 침체의 원인이 공급부족보다는 수요부족에 있다는 증거이다.

일본은 OECD 국가 가운데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고 기업소득 비중이 높은 대표적인 국가이다. IMF의 최근 보고서는 일본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노동생산성이 연간 1.5% 내외 증가했지만 실질임금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해 임금비용을 억제하고 기업저축을 확보하려고 한 생존전략은 사회 전체적으로 총수요 부족과 임금-물가 하락의 악순환을 낳고 말았다. 이는 후기 케인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비용의 역설’의 전형적인 예이다. 비용의 역설이란,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는 임금비용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 결과 임금소득이 부족해져 수요 침체를 가져오기 때문에 경제 전체적으로는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이다.

가계소득과 기업소득은 서로 적절한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 기업소득의 비중이 너무 낮으면 기업의 활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지만, 반대로 기업소득비중이 너무 높고 가계소득비중이 너무 낮으면 경제전체적으로 수요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생산한 물건을 사주는 데는 결국 가계부문이다. 일본의 생산력은 매우 우수하며, 일본 사람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일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오랜 동안 침체에 빠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가계부문이 지나치게 자기 몫을 양보한 것이다. 성장의 과실이 가계부문에 충분히 돌아가야 경제가 선순환 하게 된다. 가계에 소득이 있어야 소비가 있고 소비가 있어야 기업의 투자전망도 밝아지는 것 아닌가?

일본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의 비판자들은 임금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생산성부터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득주도성장론의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생산성에 상응하는 임금을 지급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해당 기업의 이윤율은 올라가지만, 경제전체적으로는 비용의 역설에 의한 수요의 부족 문제에 빠지게 된다.

장기침체 방어의 필요성

필자는 한국경제의 현실과 발전 단계를 감안할 때, 소득주도성장론을 장기침체 예방을 위한 구조적 총수요 확대 정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본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가계소득 비중의 축소, 인구의 정체·감소가 총수요 감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구조를 어느 정도 교정하지 않고는 계속 만성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득주도성장은 장기침체 예방을 위한 성장 방어 전략이 되어야 한다.

분배를 소홀히 하면서 지속성장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 당장 공급보다 수요부족이 더 큰 문제인데다 인구 감소가 닥쳐오고 있다는 점에서 소득주도성장정책은 여전히 시도할 가치가 있다. 물론 소득주도성장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주체가 경쟁에서 탈락하여 의욕을 잃고, 불평등의 심화와 인구감소가 사회전체의 유효수요 부족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계속 밀고 나갈 가치가 있는 정책이다.

정부의 성장정책은 기업의 성장정책과는 다르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극대화이며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장해 나가지만, 정부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히 무엇을 최대화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부든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움직인다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흔히 혁신성장이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혁신성장에 대해서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 혁신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실 혁신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이다. 혹여 민간이 알아서 잘하는 사업에 숟가락을 얹는 방식이라면 곤란하다. 그냥 이런 걸 혁신성장이라고 부르면서 소득주도성장을 폄훼하고 정책담론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국가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주도권 싸움에 불과하다.

분배는 그 자체로 중요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필자가 우려하는 바가 또 하나 있다. 분배는 그 자체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분배를 소홀히 하면서 지속성장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특히 저성장 시대의 불평등은 더 위험하다. 성장을 제약하기 이전의 문제로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민주적 질서를 파괴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밀과 피케티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 부의 분배란 사회의 법과 관습에 의존한다. 분배를 결정하는 규칙은 공동체를 주도하는 일부가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정하기 나름이다. 따라서 시대와 나라에 따라 많이 다르고, 미래에도 인류가 선택하기만 하면 더욱 많이 달라질 수 있다......”(존 스튜어트 밀, 『정치경제학원리: 제2편』)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어떤 경제적 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힘이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막는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과정은 없다.....”(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주상영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하고 1994년 미국 위스컨신-매디슨 대학에서 거시경제 및 화폐금융 분야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사회과학회 공동대표와 한국경제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2017년 12월부터 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 <거시경제학>, <화폐와 금융시스템>,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 등이 있다.

*본칼럼의 저작권은 동아시아재단에 있습니다.

주상영 joosy@konkuk.ac.kr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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