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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지나 아시아에 첫발을 내딛다

기사승인 2017.12.05  13: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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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명구의 ‘유라시아횡단 평화마라톤’ (37) - 아시아 땅을 밟으며

드디어 아시아의 땅끝 마을 위스크다르에 도착했다. 실크로드의 종착지이다. 상상만 해도 광활한 사막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낙타방울 소리가 아련하게 가슴을 두드리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곳은 최고의 역사학자들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할 오랜 옛날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로 다니는 대상들의 집결지였다. 그 낙타가 다니던 길은 지금은 고속도로가 되었고 낙타의 등대신 화물트럭과 화물선이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소아시아는 흑해, 마르마라 해, 에게 해, 지중해 등에 둘러싸인 반도. 터키 영토의 97%를 차지한다. 아나톨리아라고도 한다. 아나톨리아의 어원은 그리스 어로 ‘태양이 떠오르는 곳’, ‘동방의 땅’이라는 의미의 ‘아나톨레’이다. 강명구.

오랜 세월 실크로드는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신기루보다도 더 귀한 오아시스, 끝없이 지나가는 터번을 둘러쓴 행상과 낙타들의 행렬과 함께 사랑과 전설과 모험이 펼쳐지는 신비로운 땅이며 어린이들에게는 신비로운 동화의 대상이며 청년들에게는 아련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길을 통하여 비단과 도자기 등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 뿐 아니라 종교, 예술, 학문, 전쟁과 사랑 등 정신적, 물질적 유산뿐 아니라 동, 식물도 이동하였고, 심지어 역병까지 이동하였다.

이익을 남겨 보다 나은 삶을 꾸려갈 수 있다면 비단 뿐만 아니라 도자기, 유리와 보석 등 지구 이쪽에서는 흔하지만 저쪽에서는 귀한 것들을 찾아 실어 날랐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는 물건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가 오고가며 첨단 유행도 오고갔다. 당시 로마에는 하늘하늘 얇은 비단옷 속에 감추어진 여인들의 몸 곡선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퇴폐 논란이 일었지만 왕족들과 귀족들의 부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단이 바로 당시 유행의 선봉이었고 최고의 패션이었다.

초원은 땅이 척박하여 자급자족하기 어려운 곳이다. 동쪽에서 밀려난 돌궐은 교통의 요지 실크로드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제상인들을 품어 안고 국제무역을 주도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군사적인 우위만 가지고 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다. 그들은 오아시스의 상권을 움직이는 상인과 중국의 관료를 받아들여 제국의 틀을 다진다. 시안에서 비단 한 필의 가격이 로마로 오면 백배도 넘는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교역을 통해 얻은 막대한 이익을 제국을 유지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거대 제국 돌궐이 주도한 동서 교역은 과거 오아시스의 사막 길을 통한 한정된 교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 발전과 교역량 증대를 가져왔다.

그 길을 두 발의 근육에만 의지하여 달리며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수만 년 숨결이 울려주는 미세하고 생생한 소리를 내 가슴에 장착된 성능 좋은 확성기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잠들어 있는 유라시아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극하여 깨워줄 평화의 여정이 되기를 희망한다. 내 발걸음을 통하여 소통과 상생의 새로운 길이 열리며, 사람들이 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사랑하고 우리가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더 넓은 평화를 누리게 되길 소원한다.

AVRUPA(아브루파)는 터키어로 유럽을 뜻한다. 터널의 이쪽은 유럽이고 저쪽은 아시아다. 터널을 달려서 통과하면 의미가 클 것 같아서 협조요청을 했더니 보안상의 이유로 터키 정부로부터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골든혼의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왔다. 강명구.

유럽대륙을 지나 아시아대륙으로 들어선 것이다. 유럽의 이스탄불과 아시아의 이스탄불을 이어주는 다리는 두 개이고 하나의 터널이 있는데 한국의 선경이 시공을 해서 작년 12월에 완공을 하고 올 초에 개통이 되었다고 한다. 그 터널을 달려서 통과하면 의미가 클 것 같아서 협조요청을 했더니 보안상의 이유로 터키 정부로부터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골든혼의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왔다. 이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끊어놓지만 지중해와 흑해를 이어놓는다.

오스만 제국은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동서로 영토를 확장했다. 무라드 1세는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를 만들고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로 수도를 옮겼다. 에디르네로 수도를 옮긴 오스만 튀르크는 본격적으로 유럽 정복에 나섰다.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세르비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발칸반도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아직도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손에 넣지 못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았다. 젊은 술탄 마호메트 2세는 골든 혼 안으로 배를 댈 수만 있다면 도시를 함락시키는 건 시간문제일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배를 가지고 반대편 언덕으로 넘기로 결심했다. 나무를 묶어 궤도를 만들고 배에 수백 가닥 밧줄을 묶어서 수많은 병사와 황소들이 배를 끌어당겼다. 하룻밤 사이에 72척의 배가 산을 넘어 골든 혼 안 깊숙이 들어왔다. 배가 산을 넘은 희한한 전쟁이었다.

1453년 5월 27일, 마침내 젊은 오스만의 황제 마호메트 2세는 군악대의 북과 피리 소리에 맞추어 흰말을 타고 칼을 높이 빼들고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갔다. “가라, 이슬람의 아들이여! 보아라, 성전의 깃발은 드높이 펄럭이고 있다. 우리 병사는 하늘의 별보다 많다. 알라의 이름과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위해 전력을 대해 싸워라!” 마호메트 2세의 명령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 오스만 제국은 10만의 병사를 동원하였고, 비잔티움 제국은 7,000명이 못 되는 군사로 이에 맞섰다. 영화처럼 오스만은 크리스트교 천 년 역사를 품은 도시를 손에 넣었다.

그는 곧바로 성소피아 성당으로 가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이슬람식으로 예배를 드린 후 기독교 성당인 소피아를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레트’가 세워졌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아예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그리고 성소피아 성당 옆에 톱카프 궁전을 지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 모스크를 새로 지었다. 또한 그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큰 시장을 열었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되며 이곳에 없는 물건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성소피아 성당으로 가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이슬람식으로 예배를 드린 후 기독교 성당인 소피아를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꾸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레트’가 세워졌다. 그는 제국의 수도를 아예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강명구.

유럽을 지나는데 꼬박 3개월이 지났다. 달리는 일이 무한 속도 경쟁을 벌이는 현대문명에 반기를 든 것이라면 나는 유럽이 시작한 현대문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그 대륙을 달려온 셈이다. 그들이 쳐주는 열렬한 박수와 그들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얻어 마시며 그들이 이제 식상한 차가운 세상을 달리며 그들도 이젠 따뜻한 세상을 꿈꾼다는 것을 알았다. 현대문명은 따뜻한 온기를 포기한 것이어서 피도 눈물도 인정도 따뜻한 것이면 모두 거부해 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서 위스크다르에 발이 닿자 느껴지는 것은 아시아의 시대가 천천히 그러나 확연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시대는 아직도 서슬이 시퍼런 제국주의 시대를 보내고 만인이 서로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여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서 통일흥부가족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와서 처음 만난 날이 11월 1일 이었으니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많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동안 많이 의지했는데 이제 다시 홀로서기를 하려면 한동안 무척 힘들 것 같다. 아쉬운 작별일수록 작별의 순간은 짧고 단호하게 끝낼 필요가 있었다. 만났다 헤어지는 것도 사람의 일이니 다시 한 번 처음 떠날 때의 결연한 의지를 다져본다.

소아시아는 흑해, 마르마라 해, 에게 해, 지중해 등에 둘러싸인 반도. 터키 영토의 97%를 차지한다. 아나톨리아라고도 한다. 아나톨리아의 어원은 그리스 어로 ‘태양이 떠오르는 곳’, ‘동방의 땅’이라는 의미의 ‘아나톨레’이다.

통일흥부가족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와서 처음 만난 날이 11월 1일 이었으니 한 달이다. 한 달 동안 많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동안 많이 의지했는데 이제 다시 홀로서기를 하려면 한동안 무척 힘들 것 같다. 강명구.

카라반사라이는 옛날 대상(隊商)들과 낙타들이 먹고 자며 쉬어가던 곳이다. 낙타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약 45km이니 그 거리마다 쉬는 공간과 목욕탕, 시장 등의 편의 시설이 있었다. 내가 지금 이동하는 거리와 낙타의 이동거리가 일치하는 것도 재미있다. 낙타걸음으로 평화의 벨트를 달린다. 그 옛날 수천 마리의 낙타가 함께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행진했지만 난 지금 트레일러 트럭이 일으키는 먼지들 뒤집어쓰며 홀로 달리고 있다.

강명구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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