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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절, 나의 부끄러운 고백

기사승인 2017.08.06  2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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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15 광복절’이 다가온다. ‘8.15’는 1949년 10월 1일에 제정된 <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통상 ‘광복절’로 이해되어 왔다.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의 ‘광복절’은 말 그대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1945)는 것과 정부를 수립함(1948)으로 국권을 되찾았다는 의미를 아울러 갖고 있다. 이 점에서 ‘민족 해방’만을 기념하는 북한의 ‘8.15’는 ‘광복’이란 말로 기념하는 우리의 ‘8.15’와는 차이가 있다.

‘광복절’의 의미로 기념되던 ‘8.15’가 10여년 전에는 정부의 ‘건국절’ 제안으로 혼선을 빚게 되었고, 거기에 따라 대한민국의 기년(紀年) 문제가 제기되었다. 2006년 이 모 교수가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건국절’을 갖고 싶다고 제안한 것은 그 동안 뉴라이트가 주장하던 식민지근대화론을 근거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달리 정립해 보려는 시도의 일단이었다. 2008년 MB 정부는 뉴라이트의 주장에 따라 그 해 ‘8.15’(광복절)를 <제 60주년 건국절>로 지키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국회에서는 정 모 의원이 건국절 제정을 위한 법률 개정안을 냈고, 황 모 의원을 중심으로 <건국공로자예우에 관한 법률안>도 제출되었다.

MB정권의 <제 60주년 건국절> 선포는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훈장까지도 반납하겠다는 광복회원들의 결연한 의지표명에 정부는 한 발 물러서서 그 해 8.15를 <광복 63주년 및 건국 60주년>으로 지켜 체면을 유지하려 했고, ‘건국절’ 관련 법률개정안은 철회되었으며, <건국공로자예우에관한법률안>도 4년 후에 자동 폐기되었다. 이 ‘법률안’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노력한 이들을 예우하자는 내용으로 그 내면에는 친일파를 건국공로자로 둔갑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 뒤 한동안 ‘건국절’ 논란이 사라지는 듯하다가, 박근혜 정권이 2015년 광복절을 ‘건국 67주년’이라고 재점화시키고 그 여력으로 국정교과서도 밀어붙였다.

MB정권이 2008년 광복절을 <건국 60주년>으로 기념하겠다고 한 것은 역사학계에도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는 대한민국의 건국 기년에 대한 문제가 역사학계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런 상황에서 2008년을 건국 60주년으로 하겠다는 주장은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에 이뤄졌다는 것을 콕 꼬집어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앞 임시가설 연단 뒷면에 매달린 현수막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하여 이 날이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그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수립>은 거의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어 왔고, 거의 동일시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인식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에 수립되었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2008년의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의 <국가 수립>과 <정부 수립>을 확연히 구분하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고 했지만 그 뒤에도 새로운 ‘건국’을 시도하는 듯한 표현이 종종 나왔다. 1941년 임정에서 발표한 <건국강령>이나 여운형이 비밀리에 조직한 <건국동맹>(1944), <건국준비위원회>(1945), 김구가 1947년에 세운 <건국실천원양성소>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1919년 이후에도 ‘건국’을 목표로 하는 말이 자주 보였다. 이는 1919년의 대한민국 수립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토지와 인민을 회복하고 주권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는 그 대한민국을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지만, 이를 두고도 ‘정부 수립’이 아닌 ‘건국’으로 표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을 ‘건국 50주년’이라 썼고, 노무현 대통령도 해방 3년 후에 “민주공화국을 세웠다”고 언명했던 것은 그런 예다.

이렇게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혼용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1919년에 건립된 대한민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국가 수립은 정부수립을 동반해야 했는데 그 불일치에서 오는 인식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셋째,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선진들이 대한민국은 1919년 삼일운동으로 세워졌고 새로 수립하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인 ‘정부’라고 하는 인식을 후진들이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제헌헌법 제정 당시 선진들은 자기들이 국가를 새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이미 1919년에 세워진 국가에 정식정부를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구절을 넣었고, 그 뒤 박정희 정권이 이 구절을 제거하자 1987년 ‘6월민주혁명’을 통해 현행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구절을 부활시켰던 것은 그러한 치열한 역사의식의 결과다. 거듭 말하지만, 2008년 ‘건국절’ 문제는 이렇게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혼용되던 역사인식을 구분 정리해 주는, 말하자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필자의 부끄러운 고백은 이 대목에서 제기된다. 필자도 2008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수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거의 구분하지 않았다. 그 점은 필자가 엮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 8쇄나 발행한 『한국사연표』(역민사) 290쪽의 “1948.8.15, 대한민국 수립을 선포(하지, 미군정 폐지 발표)”라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연표 편찬 과정에서 출판사와 한국현대사를 전공하는 후배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지만, 필자의 책임이 회피되거나 면제될 수 없다. 그런데도 필자는 2008년부터 건국절을 비판하는 주장을 폈다. 그런 주장을 펴기 전에 필자 명의의 연표의 오류를 인지, 용서를 구하고 시정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매우 부끄럽다. 이 부끄러움은 필자가 평생 지고 가야 할 멍에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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