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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북한 방문기를 지금에서야 쓰는 이유

기사승인 2016.10.31  14: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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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은주의 통일맘이 간다] 제3화

Prologue : 반공과 북한

초등학생 반공포스터 @facebook

몇 년 전 SNS(Social Network System) 상에서 “포스터 그리기 지겹다 통일해라”는 제목을 떡하니 앞세운 초등학생 포스터가 널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해마다 반공포스터 그리기가 반복되다 보니 나온 발상이었으리라. 반공과 국가안보, 새로울 것 없는 분단의 상투성 그 지루함이 단적으로 표현된 사례 아니겠는가? 필자도 초등학생시절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나 반공웅변대회에 나가 몇 차례 수상했던 기억이 있다. 유승복 어린이가 간첩을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 배우며 자랐다. 어린 시절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간첩은 유관순 열사를 숨지게 한 일본 경찰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북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진 계기는 대학교 입학이었다. 광주민주항쟁 진실에 대해 알게 된 후 국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기면서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었다. 어떻게 국민들의 민주주의 요구를 북한 소행으로 선전하며 군인들이 나서서 짓밟고 정권 장악에 악용할 수 있단 말인가? 대학 3학년이었던 1987년 12월에는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사고가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총칼로 밀어붙여 장악한 권력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와 선거의 공정성을 요구하며 벌인 시민운동은 개인적으로 국가에 대한 희망을 부여잡는 일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처럼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가를 부정한다기보다 오히려 국가공동체 이상을 회복하려는 동기가 컸던 것이다.

당시 민주화운동권 일각에서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면 북한과 그 만큼 더 당당하게 대면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 있었다. 일제청산이나, 미군철수, 독재 운운하며 우리를 비방하는 근거를 털어내야 우리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민주화운동은 반공에 입각한 애국운동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우리 사회 내부로부터의 민주주의 요구를 북한의 공작이라고 싸잡는 독재정권의 이념공격을 방어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민주’와 ‘통일’은 거울의 양면처럼 우리가 극복해야할 시대적 과제처럼 주어진 때였다. 80년대부터 북에서는 김일성 우상화가 본격화한 반면 우리는 점차 민주화의 저변이 확대된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90년대 들어 김일성 사망 이후로 대규모 아사가 발생하자 북한 사회에서는 균열 조짐이 현실화됐다.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경지대에는 기아로 인한 탈북러시가 활발해진 것이다.

만 4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 왔던 2004년, 지인으로부터 북-중 국경지역 상황을 우연히 전해 듣고 돕게 되었다. 국내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보상 처리와 보상금 문제를 돕던 한 활동가가 중국으로 돌아간 조선족 동포를 찾아 동북3성을 방문하게 됐다. 그곳에서 북한 꽃제비들의 생활상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는 외국인노동자 인권운동을 사임한 후 탈북민 돕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국공안과 북한 보위부로부터 동시에 위협을 받고 캐나다로 피해 있던 중 연결되었던 것이다. 중국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귀국한 그와 더불어 중국 거주 탈북민들을 지원하면서 필자는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고 결심했다. 북한의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뭘 알아야 대화가 통할 것 같아서였다. 통일을 얘기하려면 북한을 이해해야 한다. 당연한 이치이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한 통일은 없다. 2006년 북한방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북한 첫 방문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반공포스터를 그릴 나이가 훌쩍 지난 중학생 딸아이를 둔 어느 날 필자에게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왔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개성공단이 열리고 난 이태 후의 일이다. 남북나눔운동이 주관한 황해북도 천덕리 농촌주택시범마을 지원 모니터링 방문단에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민간인들의 북한방문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반세기 넘게 유지되던 분단체제가 수명을 다하고 드디어 남북공존・공영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 믿으며 기뻐했었다. 낯설 뿐 아니라 여전히 적성국가인 북한을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는 강박이 없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이산가족이라도 된 양 마음속으로는 방북기간 내내 비장한 울음을 훔치며 다녔다. 수유리에 있었던 통일연구원에서 방북교육을 받은 뒤 2006년 6월 21일부터 24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북한을 다녀왔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에 있는 평양. 그렇지만 우리 일행은 중국 연길로 가서 북한국적기 ‘고려항공’으로 갈아탄 뒤 한 시간 쯤 걸려 도착했다. 믿음직한 단체가 주관하여 수십 명의 방문단과 함께 하는 길이었지만 처음 밟는 비행기 트랙에서부터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형용할 수 없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사람들. 북에서 사는 한 민족인 사람들. 방북 이전에도 탈북민을 만나 본 경험이 많았지만 그야말로 본토인인 북한주민들과는 스쳐 지나는 순간까지도 소중했다. 그때처럼 타자(他者)에 대해 낯설었던 경험이 또 있었을까? 지금은 신청사가 마련되어 있지만 10년 전 북한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순안공항은 우리나라 김포공항 구(舊)청사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다. 그렇지만 크게 낯설지 않았고 과거 어디쯤엔가 있었을 우리 풍경과 무척 닮은 그곳은 정갈하고 소박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단체버스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는 길. 창밖 풍경을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며 보고 또 봤다. 안내하는 참사의 인상은 전형적인 북한남자. 고구려 후예다운 강직한 외모였다. 지나는 곳곳을 설명해주었다. 길가에는 때 마침 귀가하는 주민들이 군데, 군데 지나고 있었는데 차림이 남루했다. 그는 의식이라도 한 듯 노동을 막 끝내고 가는 사람들이라 그렇다며 민망해했다. 국제사회와 우리 정부의 대규모 지원이 지속되었어도 해마다 거듭된 수해나 가뭄 등으로 식량사정이 좋지 못했고 경제난이 장기화하자 평양이나 인근의 주민들도 생활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참고로 북한은 평야가 적어 풍작을 거두어도 해마다 100만 톤가량의 식량 부족을 겪는 형편이니 자연재해가 닥치면 당장 먹을거리가 문제이다. 설상가상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변화로 물물교환이 불가능해지자 북한은 고립일로로 더욱 몰리게 된 상황이었다.

보통강여관 첫 만찬

숙소는 보통강 근처의 ‘보통강여관’이었다. 1972년 영업을 시작한 오래 된 건물이었는데 트윈 베드룸이 상당히 넓었다. 로비 한쪽 벽면을 채우는 대형 김일성, 김정일 전신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특유의 화풍으로 둥글, 둥글 덕스럽게 묘사된 그림 속의 두 사람은 대동강 다리 위에서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버이 수령 하면 딱 떠오를 수 있는 인자한 모습의 김일성 그림. 심리적 방어기제가 생겨났다. ‘독재체제를 미화하는 기만적인 그림 아닌가’ 되물으며 여장을 풀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진수성찬이 마련되어 있었다. 의례 첫날은 영접기관의 환영만찬이 있다한다. 각 테이블 마다 두세 명 씩 북측의 일꾼들이 동석했다. 민족경제협력연합회(이하 민경련)가 사업파트너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 조직과 사업조직 사람들이 따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테이블에도 두 명이 함께 앉았다.

북측 대표의 환영사와 우리 측 단장(남서울교회 이철목사)의 감사말씀이 있은 후 식사를 했다. 건배제의가 이어지면서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 북측 일꾼 바로 옆에 앉을 수 있었던 필자는 생각나는 대로 묻고 답했다. 사전에 읽은 북한현대사 책이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만찬장이 보통강여관이니 자연스럽게 보통강 개수작업 이야기를 꺼냈다. 장마철마다 평양시민들의 걱정거리였던 보통강 범람을 막기 위해 일제하에서 10년이 걸려도 마무리 하지 못했던 공사를 해방직후 시민들이 똘똘 뭉쳐 단 2개월 만에 물길 다듬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자연 옆에 앉은 참사는 기분이 좋아졌고 처음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방 달라졌다. 북한 주민들과 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다가서는 것이 좋다. 자신들의 역사를 알고 있다하니 놀라는 눈치였다. 중국 경유 일정 때문에 평양 도착 후 첫날은 저녁 만찬으로 마무리 됐다.

서해갑문 방문과 천덕리 시범마을

둘째 날에는 남북나눔운동이 2005년부터 진행했던 농촌시범마을조성사업 현장을 방문했다.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 마을에 신축된 농민주택과 유치원, 탁아소를 모니터링 하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대북지원사업이 투명하고 온전하게 진행되는지 현장방문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과정은 사업의 지속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전용의혹이 제기될 경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천덕리 마을로 향하면서 평양에서 남포까지 뻗어 있는 청년영웅도로를 타고 달렸다. 사회주의 과업 달성 성과물로 자랑스럽게 선전되는 남포 서해갑문을 보기 위해서다. 서해갑문공사는 20리 바닷길을 막아 서해안의 넓은 간석지를 조성하는 대단위 토목공사였다. 시공 당시 활동영상을 보면서 북한의 집체(集體)주의적 단결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의 인민들이 맨몸에 팔짱을 껴가며 물어 뛰어들어 갑문공사를 완성시키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남으로부터 올라가는 대북지원 배도 서해갑문을 통과해서 평양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천덕리로 향하는 차창밖에는 조용한 시골풍경이 펼쳐졌다. 마을에 도착해보니 2차 분량의 농민주택 100채와 유치원, 탁아소가 번듯하게 들어서 있었다. 인건비를 따로 책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옥 1채당 당시 가격은 1천 만 원 정도면 충분했다. 대부분의 건축자재를 중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니 통관비나 유통비 등이 더해질 테니 높은 가격이 아니다. 남북나눔운동은 지원 초기 지붕수리 공사를 시도했다. 40년 가까이 된 노후 주택에서 생활하다 보니 추운 겨울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집에서 폐렴 환자가 속출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측량을 하고보니 오래된 벽이 새 지붕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고 주택보수가 아닌 신축사업으로 바꾸었다. 이 단체는 실무자들의 깐깐한 청지기정신이 으뜸으로 소문나있다. 황해북도 깊숙한 곳에 자리한 천덕리까지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측 관료들 눈에도 같은 모습이 비춰졌기 때문이리라.

남북나눔운동 뿐만 아니라 많은 대북지원단체들이 처음 지원을 시작한 1990년대 이후 2000년대에는 전문적인 개발지원단체로 성장했다. 북한에서 자연재해와 경제난이 지속되자 긴급구호로 시작된 인도적 지원은 장기적인 개발사업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이다. 초창기 현지 적합성이 떨어지거나 사업이 중복되고, 지역이 편중되는 등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장기간 지속된 남북교류는 민간부문 지원역량을 그만큼 성장시켰다. 천덕리 주택사업에 참여했던 설계업체는 북한 현지 자연환경에 맞는 도면을 만들게 됐다. 100채, 200채 사업이 지속되다 보면 더욱 적합한 모델이 개발될 터였다. 그렇게 얻은 기초자료는 통일시대를 위한 실질적인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천덕리에는 향후 간이진료소와 마을회관, 목욕탕, 이발소, 기계작업실, 창고 등 시설을 추가하며 ‘북한농촌시범마을조성사업’이 본격화될 예정이었다. 안정적인 주거환경 속에서 자립적인 생산기반을 구축하려 한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멈춰 서 있는 상태다. 모니터링 참관인들은 평양을 벗어나 평범한 농촌풍경을 둘러 본 것만으로도 남다른 감흥에 젖어들기 충분했다. 번듯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할 북한당국의 의도를 훨씬 넘어 선 속 깊은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칠골교회

중요한 일정을 무탈하게 마친 방문단은 셋째 날 좀 더 여유로운 기분으로 묘향산을 방문했다. 평양을 나서기 전 만경대구에 위치한 만경대를 방문하고 인근의 칠골교회에서 예배도 드렸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아버지 김형직 역시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를 졸업했고 독립운동 당시 돈독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활동했다는 증언도 있다.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성경교육에 열심인 교육자였고 딸의 이름을 ‘반석’ 즉 베드로의 별칭으로 지을 만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칠골 동에 세워진 칠골교회는 어머니 강반석이 다니던 하리교회와 송산교회 터에 복원된 교회로 1989년 준공됐다. 100여명이 한 번에 예배할 수 있는 예배당 안에서 칠골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와 성가대의 찬양, 우리 대표단의 기도 등이 이어지는 연합예배를 드렸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복음 안에서는 이미 한 형제이며 자매인데 민족화합의 길은 너무 고단하고 험하다고 느끼며 쏟은 하소연이기도 했다.

1988년 만경대구에 건립된 봉수교회와 더불어 칠골교회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며 부흥기를 누렸던 평양지역 그루터기 신자들이 출석한다. 1980년대 북한이 국제 개신교조직과 교류하면서 발굴한 가정교회(전쟁당시 미군 폭격으로 예배당이 전소됐기 때문에 생긴 신자들의 예배공동체)는 520여 곳. 신자는 1만 2천명에서 1만 4천 여 명으로 추산했다. 1983년 찬송가와 신양성경이 출판되었고 1984년에는 구약성경도 출판됐다. 당시 국제개신교기구 ACC(Church Council of Asia) 총무였던 박경서 전 인권대사가 막후역할을 했다. 남북교류가 활발해지자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과 한국교회들은 대북지원을 위해 다양하게 협력했고 그만큼 북한 내 조그련 지위도 향상됐다. 북한선교 측면에서 ‘교회를 통한 지역사회 봉사’전략은 훌륭하다. 북한교회 진위논쟁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전략부재의 단견에서 비롯된다. 남북나눔운동은 칠골교회 목사님, 신자들과 오랜 기간 함께 기도하며 화해의 메신저가 되고 있었다.

묘향산 국제친선박람관

국제친선박람관은 묘향산의 산세를 십분 활용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어떤 타격에도 방어가 가능하도록 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경제현황을 보고 받던 곳이기도 했다. 김 주석은 관료들의 보고에 역정을 내다가 쓰러졌다한다. 경제 현황파악을 위해 현지에서 직접 확인해 보니 통상적인 보고내용과 크게 달랐는데 7월 8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전준비 작업에 몰두하다가 4일 급서한 것이다. 당시 기상이 악화되어 헬기를 띄울 수 없었다는데 깊은 산속 지형으로 봐서 과연 그럴 만도 했겠다 싶었다. 한국전쟁 시 평양은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혹 폭격하지 않을까 싶어 피해 들어갔지만 여지없이 공격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북한의 피해의식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국제친선박람관은 북의 체제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웅변하는 전시관이다. 이를 평양으로부터 뚝 떨어진 묘향산 속에, 항공상으로도 공격이 쉽지 않은 곳에 차려 놓은 것을 보니 짐작이 갔다.

1042년에 세워졌다는 대웅전이 있는 보현사도 근처에 있어서 둘러보았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본격적인 남북 체제대결이 시작됐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를 국제적으로 선전하면서 사회주의국가들을 비롯하여 비동맹 국가들과의 친선에 열심이었다. 각국으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모아 전시해 놓은 곳이 국제친선박람관이다. 육중한 입구의 문을 지나면 대리석과 샹들리에로 잘 차려진 로비를 지나 대형 전시관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신발에 묻어 있던 흙이라도 바닥에 묻힐까 참관자들은 모두 신발덮개를 써야 했다. 안내원의 설명은 한 결 같이 체제선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집트, 쿠바, 루마니아, 동독 지도자들과의 교류사진에 눈이 갔다. 그 중 특히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독재체제 구축에 활용하려고 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젊은 시절부터 교류했던 것 같다. 김일성 밀랍모형을 모셔 놓은 방도 있었다. 허리 굽혀 절을 하도록 안내했지만 우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안내원들은 종교의식이라도 하는 양 정중하고 엄숙하게 절을 했다.

우리 기업들의 선물도 종종 눈에 띄었다. 현대는 특대 형 다이너스티 리무진을 선물했고 대우, 삼성, LG 등 대기업 선물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 ‘고객만족’이라고 쓴 족자선물은 가장 위트 넘쳐 보였다. 기업에게 북한은 민족이나 동포 등 감상적인 대상만이 아니고 시장의 고객이다.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한편 언론사들의 선물도 전시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동아일보는 1937년 4월 국내 최초의 무장 항일투쟁이었던 보천보전투에 관한 호외 보도 신문 원판을 1.2kg 금으로 제작해 선물했다. 중앙일보는 준보석이 박힌 시계를, 한겨레신문은 창간호 동판과 만연필 등을 선물했다. 언론사에게 북한은 어떤 대상일까? 민족정론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기개와 융통성이 적절하게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립박물관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거나 역사적 의미가 큰 물품들이 있기 마련인데 각국으로부터 받은 외교적 선물들을 자랑삼아 전시하고 있는 북한은 달라도 한 참 달랐다.

Epilogue : 승공(勝共)과 북한

10년 전 방북했던 북한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3박 4일 동안 정해진 구역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녔지만 많은 배움이 있었던 초행길이었다. 북한에서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평화를 위한 일이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10년 전 기억을 더듬는 것은 왜일까? 통일시대가 활짝 열릴 것만 같았던 분위기는 온데 간 데 없고, 핵과 사드배치로 한반도에는 다시금 전쟁 기운이 솟구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생각하고 공부해 봐도 한반도에서 남북이 함께 잘살기 위해서는 전쟁보다는 평화가 우선이다. 정전협정 상태인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다. 전쟁비용은 평화유지비용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우리는 2016년 국방예산만 38조 7,995억 원으로 하루에 약 1,063억 원을 쓰고 있다. 이 중 1/3 정도 만 교육, 의료, 주택 등 공공복지에 쓴다면 국민행복지수가 얼마나 향상되겠는가?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소련과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1953년 이후 미국으로부터 줄곧 제재를 받아왔다. 1989년 12월 미국과 소련이 몰타선언으로 냉전이 종식되었음을 천명한 이후에도 제재는 풀리지 않았다. 북한이 1992년 미국에 국교수교를 요구하며 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한 것도 탈냉전 맥락에서였다. 부시 미 대통령(Sr.)은 그때 한반도 분단문제를 책임지는 차원에서 북한과도 수교했어야 했다. 우리는 소련(1990년), 중국(1992년)과 수교했지 않았는가. 그때 남북 교차승인이 불발되면서 북한은 핵무장의 길로 걸어들어간 것이다. 당시에도 북한붕괴론이 팽배했다. 북한 ‘급변사태론’이 이처럼 역사를 왜곡시켰다.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전환이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는 까닭에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처럼 북한정권도 쉽게 붕괴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중국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시스템은 이미 1990년 이전에 역사적 실험을 완료했다. 공산주의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북한조차도 1992년 헌법을 갈아치우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혁명을 포기했다. 대신 ‘우리식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주체혁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날 북한에게는 페이스메이커(Pace Maker)가 필요하다. 중국이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우리 역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길을 폐쇄했다. 이제 누구, 누구를 비난하는 일은 의미 없다. 이해도와 견해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북한 핵문제를 잘 풀어야 우리 민족의 번영과 한반도 평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10년 전이라 할지라도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진 북한방문 기억은 남북교류협력 역시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다는 신호로 생각된다. 길은 계속 해서 걸어야 만들어진다. 길 위의 잡초가 더 무성해지기 전에 통일시대를 향한 문이 속히 열리길 빈다.

윤은주 / (사)뉴코리아 대표, 북한학 박사

윤은주 ejwarrior@hanmail.net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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