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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적 수용으로 판을 바꾸라

기사승인 2021.09.07  10: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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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10여 년 전 조지타운대학의 찰스 쿱찬(Charles Kupchan) 교수는 『적은 어떻게 친구가 되는가(How Enemies Become Friends)』라는 책을 출간하여 세계적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쿱찬 교수는 13세기 이래 있었던 수많은 침략과 전쟁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적 관계로 발전한 나라들은 한결같이 어느 한편에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수용(unilateral accommodation)하는 전략적 결단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 선의의 일방적 조치가 상호절제와 교류협력, 새로운 내러티브와 정체성 창출 노력으로 이어져야 성공적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나, 일방의 선제적 수용이 적을 친구로 만드는 첫 단계에서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평화 프로세스가 교착국면에 있는 한반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반도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지난 70년간 평화와 안정을 비교적 잘 지켜왔다. 하지만 적대적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켜 더 적극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조성과 평화구축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러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교류가 있었고, 북한과 미국 간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로 약속한 역사적인 싱가포르 선언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선언과 노력이 구체적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의 혹독한 경험과 상처가 너무 커서 상대를 적이 아닌 친구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전쟁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묘안은 없는지, 왜 한반도에서는 평화가 결실을 맺지 못하는지 진지하게 한번 따져 볼 필요는 있다.

문제와 갈등이 한계에 다다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통상 두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는 양측에서 원하는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문제의 초점을 완전히 좁혀 접근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문제를 더 확대하여 큰 틀에서 접근하는 전략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미국 간 공통분모를 찾기 위해 문제를 좁혀가는 방식을 취해 왔다. 북한 비핵화와 한미연합군사훈련, 대북제재 해제 등을 연계하고, 관계정상화 등의 카드를 활용하는 맞대응 전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은 북한에 통하지 않았고 효과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면한 문제의 판을 더 키워 큰 틀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전략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에서처럼 외교와 경제, 문화로 문제를 확대하여 연계하고 교환하는 복합 평화전략을 추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바둑을 둘 때도 한 곳에서 수 싸움이 교착상태에 이르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선택을 한다. 최근 평화학에서도 외교적 노력만 아니라 개발 및 인권과 같은 경제사회적 조건을 평화증진으로 연결하는 문제해결을 제안한다. 한반도에서도 지난 몇 년간 평화경제와 개발협력, 평화-발전-인권의 선순환 등과 같은 대담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평화구축의 조건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 고무적이다.

중국이 제안하는 쌍중단-쌍궤병행이나 러시아의 3단계 해법도 현재의 미국식 접근보다 판을 키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따라서 미국이 준비해야 하는 전략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구상보다 더 크고 대담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는 아직 상대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미국만이 그 일을 주도할 수 있다. 과거에는 헌팅턴이나 브레진스키 같은 학자들이 미국이 수행해야 할 대전략을 고민했었는데, 요즘 미국에는 대학자나 큰 정치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경제나 외교와 같은 소프트파워로 대전략을 구사하려 하지 않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폴 케네디의 말을 빌리면 그러한 현상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이미 쇠락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미국이 손을 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길이 없고 시간은 점점 미국에 불리해지고 있다. 미국의 국력이 조금이라도 우월한 위치에 있는 지금이 판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제재 카드만 만지작거리지 말고 평화협정과 관계정상화, 경제협력과 문화교류 등으로 평화의 판을 확대하는 전략적 용단을 내려야 한다. 당장의 힘겨루기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미중 패권경쟁에서 북한을 미국에 편입할 수 있는 대담한 구상으로 시급히 눈을 돌려야 한다. 결국 누군가가 먼저 대담하게 판을 키우고 선제적 수용을 통해 협상을 시도해야만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안정적 평화구축이 가능해진다. 관계정상화와 평화조약 체결 등 선제적 수용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비핵화는 물론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길이 열릴 것으로 확신한다.

김병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평화통일연대 전문위원

김병로 philo@snu.ac.kr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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