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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공정과 정의: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기사승인 2021.07.16  10: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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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제162호

오늘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 변화되는 쟁점의 구도

공정과 정의라는 두 단어가 현재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든 사회적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 민주화가 공고화되어 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왜 이렇게 공정과 정의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였을까? 이 두 가지 개념이 한국의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국은 현재 또 다른 심층적인 전환의 시기를 겪고 있다. 1987년의 민주화 이행과 이어진 민주공고화, 1997년의 경제위기, 그리고 2016년에 시작된 대규모 촛불시위와 대통령 탄핵 등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과 한국 역사의 역동성을 보여준 계기들이었다. 하지만 현재 일고 있는 사회적 논쟁과 변화는 한국 사회와 개인의 삶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가 더 큰 질적 변화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정과 정의라는 새로운 화두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한국 내의 쟁점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이 논쟁이 엘리트 계층에 국한된 논의인가? 현재의 논쟁은 일부 엘리트들의 본인들이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최근 개혁-보수, 좌-우 등의 개념이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 속출하면서 새로운 시대정신과 철학적 원칙을 요구하는 욕구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2)한국 사회는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헬조선’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은 공정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는 반면, 그래도 한국 사회는 국제적 기준에서 상당히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3)공정하고 정의로운 한국을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각 정치 사회세력 및 시각별로 진단이 달랐고, 그들이 사용하는 공정과 정의의 개념도 달랐다. 공정과 정의라는 개념은 원래 주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의 가치나 원칙을 다시 후퇴시키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가 부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였다. 정부의 반복된 부동산 정책의 실패로 인한 부동산 가격 폭등과 주거 불안정, 그리고 이 와중에 드러난 정부기관(LH 공사)의 내부 정보를 이용한 땅 투기와 정부의 감독실패는 젊은층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에게 커다란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2021년 4월의 서울과 부산 시장 선거에서 야당의 압도적 승리로 나타났고, 한국 사회가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라는 사회적 논쟁에 불을 붙였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철학적 논쟁: 한국에서의 의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정의의 제1원칙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에 대한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고 목적으로서 대우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인간답게 살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그럼, 현대사회를 어떻게 정의롭게 만들 것인가? 존 롤스(John Rawls)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평등주의적 비전을 제시하였다. 즉, 절차가 공정하다면 그 결과 또한 정의롭다는 의미이다. 롤스는 더 나아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보장된다면 직업이나 지위에서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허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자유주의적 철학을 강조한 노직(Robert Nozick)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취득된 사유재산권이나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권리나 사회적 필요를 위하여 침해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직에게는 자발적 기부 이외에 큰 정부에 의한 세금 징수나 복지정책 확대는 정의롭지 않은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정의: 무엇이 올바른 일인가”라는 책에서 위에 제기된 철학적 논쟁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1) 사회 전체의 후생을 최대화하기 위한 공리주의적 철학, 2)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철학, 3) 공적 미덕을 함양하기 위한 공동체주의적 대안 등이다. 그는 공공적 미덕을 함양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이를 통해 사회적 후생과 개인적 자유의 조화도 추구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생일 케익을 열 명의 친구가 똑같이 나누는 공정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케익 조각을 가져가는 순서가 따로 있다면 제일 먼저 가져갈 사람은 케이크를 똑같은 크기로 자르는 것을 거부하였을 것이다. 자기가 가장 큰 조각을 원할 것이기 때문에 케이크를 다른 크기로 나누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가져갈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 속에서 모두 자기가 꼴찌로 제일 작은 조각을 가져갈지도 모를 위험을 회피하기 위하여 케이크를 똑같은 크기로 자르게 된다. 이것이 롤스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가상적인 현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사회에서 특정 사회구성원은 다양한 방법으로 케이크를 가져갈 순서를 미리 알고 있거나 조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차를 위반했을 때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합의가 있을 때 게임은 더 공정해진다. 그렇다고 케이크가 충분히 크지 않다면 모두가 똑같은 크기의 케이크 조각을 가져가는 평등이 최선의 문제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이 점이 평등보다 공정이 더 중시되는 이유이다. 게다가 때로는 모두가 충분히 가질 수 있다면 큰 격차가 있더라도 그 사회가 더 정의로울 수 있다는 논리가 인간 본성에 더 어울린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공정과 정의를 둘러싼 갈등이 폭증하고 있다.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경제성장의 속도가 느려지고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확산되었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사회 각 구성원들은 더 이상 ‘무지의 베일’이 제대로 작동할 것으로 믿지 않음과 동시에 각자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계층, 지역, 세대, 젠더, 직종 등 모든 분야에서 소위 집단행동의 딜레마가 나타나고 있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환경과 제도를 설계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고 있다.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있다. 무엇이 공정이고 정의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래에 제기되는 질문들은 어느 하나 쉽지 않다. 보편 복지와 선별 복지 중 무엇이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여성 할당제 등 각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은 공정한가? 정부에서 걷는 세금은 정의로운 것인가? 실력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회사에서 사장이 종업원의 수십 배의 급여를 받는 것은 공정한 것인가?

 

한국에서의 공정과 정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2017년 5월 10일 취임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박근혜 탄핵 이후 새로운 사회를 기대한 국민들은 열광하였다. 그런데, 현재 똑같은 이름의 가치들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화두로 사용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왜 이 같은 가치를 구현하는 데 실패하였을까?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기회균등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만큼 과정을 더 공정하게 만들기 위하여 솔선수범하고 좋은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정치공학에 입각하여 불공정한 법적 규제를 양산하였다. 무능력과 내로남불로 점철된 과정은 정의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게다가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구성에 대한 젊은 세대의 거센 반발에서 경험하였듯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가 희생될 수 있다는 사고는 더 이상 공정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것이 되었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집단의 원칙이나 의지보다는 개인적 자발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한 주요 정책들은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화 사례는 과정으로서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경우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절차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 모두를 충족시킬 것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환 과정에서 적용되어야 할 공정한 경쟁의 절차가 결여되었다. 대통령의 과도한 정치적 약속 때문에 실력을 검증할 평등한 기회는 없어지고 운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오랫동안 취업을 준비해온 젊은 세대에게 좌절과 분노를 일으켰고, 젊은 세대 내부에 노-노 갈등만 부추기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최근 정치권에서 공방이 되었던 여성할당제도 핵심이 어긋난 사례였다. 장관급의 특정 비율을 여성으로 충원한다는 제도는 남녀 간 불평등한 사회진출을 개선하기 위하여 고안된 정책이다. 국제적으로도 흔히 도입되었던 정책이다. 현 정부에서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을 너무 편협하게 임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여기에 여성할당제를 명분으로 오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이 제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 없이 공정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법적으로 도와주는 일시적 제도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 같은 제도가 아직 정착되지도 못한 초기 상태이다. 현 정부의 편협한 인사 정책은 오히려 많은 다른 여성들의 기회의 평등을 해칠 수도 있다. 최근 25세 여대생의 청와대 1급 비서관 채용은 공정성은 고사하고, 해당 업무 수행에 필요한 실력과 경험에서도 옳지 않은 사례로서 특히 젊은 층에서 큰 비판이 있었다.

최근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세금문제는 오래전부터 평등, 공정, 정의 등에 관한 철학적 정치적 논쟁의 단골 소재였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지 사회적 책무를 중시할지에 따라 재산권과 세금을 보는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대체로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고, 세금의 액수는 지불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논리가 국제적으로도 사회적 합의를 얻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세금은 시민적 책임과 사회적 공헌의 척도로도 여겨지며, 사회통합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수단으로도 비쳐진다. 하지만, 현 정부는 세금을 징벌적 수단이나 표를 얻기 위하여 진영을 나누는 손쉬운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은 사람의 비중이 약 38% 정도로 매우 높다. 주요 복지국가들은 높은 복지를 유지하면서도 세금 감면은 최소화함으로써 국민들의 책임 있는 주인의식을 고취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주장들이 있었지만,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개선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부에서는 부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프레임을 만듦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도 초래되었다. 이러한 정책이 정의로운 결과를 낳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이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고 공정하지 못한 사회인가? 국제적으로 비교해 보면, 한국사회는 그래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온 역사를 보면 이에 대한 희망은 여전하다. 원래 한국인은 평등과 공정에 민감한 문화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즉,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한국 사회의 객관적인 부의 불균등은 OECD 국가의 평균보다 좋은 편이지만, 사회구성원이 느끼는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한국은 소득 수준에 비하여 행복도가 낮은 사회에 속한다. 이러한 성향은 사람들이 사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보거나 개인이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도전적이고 역동적인 미래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한 사회가 공정과 정의에 얼마나 민감한지는 영화에서도 간접적으로 반영된다. 한국 영화 ‘기생충’과 미국 영화 ‘조커’를 보면, 두 사회의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이를 해결해 가려는 고민의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기생충에서는 사회적 격차와 정의의 문제가 하층민의 도전과 신선한 집단적 저항으로 묘사되고 있다. 때로는 그 결말이 비극적이고 파괴적일지라도 사회에 누적된 불평등과 정의의 문제를 가감 없이 들추어내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 계층별로 달리 풍기는 냄새의 차이는 불평등에 저항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의지를 보여주었다. 반면, 조커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고발하면서도 이를 조커 개인의 삶과 정신적 질환, 그리고 일탈된 행동으로 묘사하는 선을 넘지 못하였다. 두 영화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계층이동의 계단 장면이 왜 이렇게 달리 묘사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두 사회가 안고 있는 철학적 원리와 사회구성원 간의 힘 관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기득권과 돈의 힘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아마도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질서와 사회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희화화하는 영화를 만들기 힘들 것이다. 이는 감독의 창의성이나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라, 부와 권력의 분배가 너무나도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미국의 사회적 구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마이클 샌델이 출간한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책이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실력은 온전히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부모나 인맥 등 다른 요인들과 운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실력이 완전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주장이다. 요즘 한국 정치권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한 진보적 논리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두 나라의 현실에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대학입시에는 레거시가 많이 작용한다. IVY 리그 대학에서 신입생을 선발할 때 지원자의 부모나 형제가 동문일 경우 합격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버드대학교의 경우 약 16%가 레거시로 뽑힌다고 한다. 부모의 배경도 자신의 실력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고 이 점이 사회적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기여입학제도도 광범위하게 실행되고 있다. 미국 사회 내에서 기여입학제에 대하여 비판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다. 대신,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한다고 하여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 부모가 가난한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이 대부분이다. 기부금으로 받은 돈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사회는 이것이 공정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다양한 우대제를 유지하고 있어서, 가난한 집안 출신의 흑인 여성 학생이 어느 정도 실력만 갖춘다면, 명문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졸업 후 의대나 법대 등에 합격할 가능성도 높다. 또한 미국에서는 상속세 면세액이 1,170만불이다. 한국에서 이와 유사한 제도는 상상도 하기 힘든 불공정과 부정의의 상징이 될 것이다. 물론, 미국과 비교된다고 하여 한국의 오늘의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미국은 공정에 대한 합의된 기준이 낮지만 철저히 지키고 이를 어길시 누구든 예외 없이 공정하게 처벌받는 사회이다. 반면 한국은 기대수준은 높이 설정하고 잘 지키지 않으며 이를 위반할시 처벌은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 커다란 논쟁이 된 ‘조국 사태’는 한편으로는 한국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가 상당히 공정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아마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정도의 고위직의 딸이 어느 정도 성적만 유지하였다면 표창장 등의 ‘위조’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다. 최근 언론에 등장한 작은 뉴스 하나는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은 자화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옮겨갈 시골의 신축 사저 주위의 주민들이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를 들어 대통령의 사저를 반대하는 현수막을 내걸은 경우이다. 과연 이 같은 행동이 성숙한 행동인지, 아니면 한국의 신뢰 수준이 이 정도로 저하되었는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현 정부가 그동안 진영논리에 입각해 외쳐온 왜곡된 공정 및 정의의 개념과 반복된 갈라치기 전술이 가져온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고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과 비판을 서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최근 글로벌 팬데믹 이후 급성장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한 IT기업 내에서 젊은 직원들이 공정과 정의의 차원에서 연봉인상을 집단적으로 요구하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기업 총수가 자신의 연봉 반납을 약속한 사건도 한국사회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럼,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높은 질을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민주주의적 기반은 충분하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고 이를 제도와 생활에서 정착시켜 가기에는 많은 시간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재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법적 제도적 절차나 민주적 가치를 충실히 지키는 것이 필요조건이다. 이는 법적 절차적 공정성을 확보하는 첫걸음이다. 구성원 누구에게나 일관되고 투명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반칙이나 차별도 발생하여서는 안 된다.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나 자기편의 보호를 위해 법과 제도가 불공정하게 적용될 때, 정의는 고사하고 민주주의 자체가 퇴보될 수 있다. 이 같은 절차적 공정성이 지켜질 때 모든 사회구성원이 그 결과를 정의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든 모든 이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기 힘들다. 따라서 합리적인 제도 하에 절차적 공정성이 지켜졌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 결과를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그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의 철학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해당 제도의 의도와 결과가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각 분야에서 공정한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최소화하고 공정성과 정의를 높이기 위하여 다양하고 세심한 정책수단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군필자 가점제, 여성할당제, 독립유공자 혜택, 장애인할당제, 농어촌할당제 등은 기회를 박탈당했거나 구조적으로 차별당한 사람들에게 적절히 보상하거나 그런 구조를 교정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산술적인 기회 균등이 아니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이 같은 제도들은 민주적 절차와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다양한 형태로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로 인하여, 현재 한국에서는 주거문제가 공정과 정의의 핵심으로 등장하였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함으로써 젊은 층을 비롯한 집 없는 사람들은 부모 등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더 이상 집을 소유할 수 없고 임대료도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주거문제에 있어서 공정과 정의는 무엇이고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아파트 청약 조건이 공정하게 관리되는 것이 절차적 공정성이고, 누구든 열심히 저축하고 준비하면 합리적인 가격에 적절한 시기에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정의이다. 하지만, 아무리 분양절차에서 절차적 공정성이 확보되었다 해도, 주거문제 해결이라는 정의로운 결과는 불가능해졌다. 한국에서 주거문제에서 정의와 공정성을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는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부자들이 돈을 더 벌 수 없도록 하겠다는 도덕적 원칙을 강조하면서 재건축 등 추가 공급을 몇 년간 억눌러 왔다. 신규 주택공급에는 최소한 5-6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당분간 주택공급 부족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이는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사례는 선악에 기초한 어설픈 규제와 정책적 무능력이 공정과 정의를 실질적으로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이익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그리고 실력과 운에 대하여 어떤 황금률을 만들고, 어떤 경쟁을 촉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제도설계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각 구성원의 성찰과 노력,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할 경제적 여건과 정책적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경제적 파이가 줄어들고 미래가 불안해질수록 공정과 정의에 대한 합리적인 논쟁의 장이 좁아질 것이다. 자기의 성공과 남의 실패는 실력 탓이고, 나의 실패와 남의 성공은 운 탓이라는 분열적 사회현상이 조성될 수 있다. 이럴 때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이익의 조화는커녕,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공적 미덕과 선의의 신뢰를 함양하기 위한 모든 구성원들의 성찰과 참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기고문의 견해는 필자의 개인 의견이지 동아시아 재단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소개

류상영은 현재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이고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의 editor를 맡고 있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1995-2001)을 지낸 바 있으며, 일본 게이오대학 방문연구원,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와 토론토대학교의 방문교수 등을 지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관장(2004-2009)을 역임하면서 <김대중 구술사>를 구축하는 등 사료 수집과 연구에 힘썼다. 그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역사와 정치경제에 관해서 많은 연구결과를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한국의 정치사와 정치경제를 민족주의로 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류상영 syrhy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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