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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편견’에 대하여

기사승인 2020.10.20  15: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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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여성에 대한 편견에 답하다’ 기고문

10여 년 전 만났던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의 저자는 “인도에 머무르는 기간이 늘어갈수록 인도를 더 모르겠다”며 “수년을 보냈으나 인도에 일주일 다녀온 사람보다도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적다”고 웃었다. 며칠 인도 여행을 다녀와 책을 펴내 베스트셀러가 된 유명 시인을 겨냥한 말이었다. 달랑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당당하듯, 단면만 아는 사람이 늘 용감한 법이다.

이는 탈북민과 통일 담론을 다루고자 창간한 〈유코리아뉴스〉에서의 기자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팩트 체크가 어려운 북한/통일/탈북민 분야에는 특히 자칭 ‘전문가’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이념과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마다 자기의 주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신뢰할 만한 취재원은 “탈북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말하는 이들이었다.

 

1.

탈북민 한 명 한 명을 인터뷰하면서 ‘탈북민’에 대한 고정관념은 깨졌다. 나쁜 편견이든 좋은 편견이든 깨졌다. 저마다 고유한 인격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고정된 틀 안에서 설명될 리 없었다. 그리고 ‘탈북민’이라는 용어 자체도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개인의 사고 범주 안에서는 매우 주관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개인/사회의 사고 범주에는 ‘위계 질서’가 내포되어 있다. 내 사고틀 속 ‘탈북민’의 위계가 깨어진 계기는 미국 내 탈북민을 취재할 때였다.

미국에서는 ‘탈북민’과 ‘한국인’의 구분이 없다. 미국 백인의 기준에서는 남한 사람, 북한 사람, 탈북민이 모두 ‘코리안’이었다. ‘코리안’으로 한 데 묶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미국 주류 구성원에게 받아들여질지는 다른 문제였다. 그곳에서 그냥 ‘우리’는 소수민족, 동양인, 비주류 계급이었을 뿐이다.

남한에서 오래 살다가 미국에 정착한 한 탈북민은 그래서 미국 사회가 더 살기 좋다고도 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탈북민”이라는 남한 사회의 규정과 낙인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편견의 덕을 본 사례도 있다. ‘North Korea’의 군사 교육에 대해 알고 있는 고용주들이 탈북민들을 보안/경비 관련 직원으로 고용했다.) 한 사회의 편견은 약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미국 LA의 한인 음식점 ‘유향순대’에서 파는 순대국. 이 음식점은 2012년 6월 이범진 기자가 현지 취재 당시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방문했던 곳이다. LA엔 한인과 탈북민 사이에 편견이 없었다는 게 현지를 취재하고 온 이범진 기자의 고백이었다.

2.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이 확산 중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20세기의 가장 강력한 사회 혁명은 페미니즘 혁명”이라고 말했다. 인류 역사 수천 년간 차별을 당해온 여성이 우리 사회의 기본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인간(존재)으로서 동등하다’는 당연한 주장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곳곳에서 갈등의 원인으로 공격받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큰 목소리를 내며 담론을 형성해온 다수가 남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분류하고 구축해온 ‘여성’이라는 틀이 무너지는 게 불편한 것이다.

탈북민 중 70% 이상이 여성임에도 탈북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사람 중 대다수는 남성이다. 물론 탈북 여성이 대거 출연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었으나, 편견을 좁히기보다는 북한의 이질성을 소비하는 데 그쳤고 일각에서는 성 상품화 방송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누군가를 ‘탈북 여성’이라는 사회적 편견, 주관적 편견에서 걷어내기 위해서 잠시간은 ‘분류’ ‘규정’ ‘범주화’가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그 누구도 ‘탈북 여성’이라는 범주에 갇히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매년 걸려오는 ‘탈북민 설문조사’에 매우 지쳐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 ‘탈북민’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한 사람의 사람으로 말이다.

 

3.

나는 탈북민을 잘 모르고, 당연히 탈북 여성은 더더욱 모른다. 그저 취재하며 인연을 맺은 몇몇 북한 출신 시민과 아주 가끔 연락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 중 20대 한 명은 북에서 홀로 내려와 힘겹게 일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을 한다. (100명 중 1명은 오히려 북한에서 송금을 받기도 한다.) 여느 20대 ‘흙수저’ 청년들처럼 힘겹게 살아간다. 가족과 친구 등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의 생활이라 더 어려울 것이다. (요즘은 ‘역차별’ 논란도 있다. 명문대에 특례 입학을 하거나 주거지를 제공받는 등의 혜택이 과잉 지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란이 점점 불거지는 이유는 그만큼 남한 사회가 학벌에 따른 차별과 부동산 소유에 따른 계층 분화가 더 거세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잘 가꾸어서(?) 좋은 남편 만나라”는 말이 남한 사람들의 주된 조언이었다고 한다. 북한 출신의 20대 여성 청년이 남한의 경쟁 사회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담긴 조언이었다. 그 우려 속에서도 이런저런 자격증을 따 취업을 했고, 사람들과 교제하며 보통의 청년들처럼 한 시민의 몫을 살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삶을 알아갈수록 특정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갖고 있던 고정된 이미지는 점점 흐려진다. 그 모호함 속에서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 때문에 우리는 그/그녀를 섣불리 정의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고정된 이미지로 결론내릴 수 없다는 겸손함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4.

문제는 과연 ‘더 알고 싶은가?’이다. 앞서 언급했듯 사람을 분류하고 규정하여 틀 속에 가둘 힘이 있는 지식인을 비롯한 주류 계층은 자신이 가진 이미지를 고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남성/여성, 원주민/이주민, 노동자/이주노동자 등의 구분과 그에 따른 차별이 내 일상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면, 구태여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난민, 이민자, 성 소수자, 실업자, 페미니스트 등에 특정 이미지를 입혀 정의내리고 전파한다. 분류하고, 규정하고, 전파할 힘이 있는 그들의 ‘낙인’은 꽤 세련된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슴 아픈 것은 (규정 당하는) 약자들끼리의 아귀다툼이다. 남한의 빈곤층은 탈북민의 사회통합을 위한 생계 지원을 ‘역차별’이라 주장하며(물론 따져볼 만한 사안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명문대 입학하고 싶으면 북한 갔다오라”는 비아냥거리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조선족 동포가 탈북민을 경계하고, 탈북 남성이 탈북 여성을 무시한다. 누가 더 힘드냐, 누가 더 자격이 있느냐로 설전을 벌인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은 아닐까. 우리를 범주화하고, 규정한 이들이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규정하고 낙인찍는 이들에게 맞서려면 약자들끼리의 연대가 먼저 아닐까.

 

히틀러에게 저항했던 루터파 목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유명한 시가 있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내게 왔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분류하고 규정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살피지 않는다면, 그들이 씌운 안경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 렌즈에 의해 ‘나’도 언젠가는 홀로 남겨질 것이다.

많은 탈북민을 인터뷰했다고 자랑했으나, 힘들 때 따뜻한 평양순대국 한 그릇 건네며 위로해주셨던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잠시간 씁쓸할 뿐) 별일 없이 잘살고 있다. 코로나블루(코로나19로 인한 우울감)로 인해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급증했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친구에게 문자 한 통 넣지 않았다.

나 역시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범진 / 월간 <복음과 상황> 기자, 전 <유코리아뉴스> 기자

 

*본 기고문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범진 poemgene@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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