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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군철수론’을 그대로 받으면

기사승인 2020.06.23  10: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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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통일연대 '평화칼럼'

올해가 우리 민족사의 비극 ‘6.25’ 70주년이 되는 해다. 6월 22일은 ‘굴욕적인’ 한일수교 55주년 되는 날. 알량하게 역사 공부를 했답시고 이렇게 날과 시간을 헤아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70주년, 이제는 한반도에서도 휴전체제를 종전체제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미국의 불통에도 불구하고, 70년이라는 세월은 ‘6.25’의 적대 관계를 종전선언과 평화관계로 해소시켜야 했다.

8살,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학교 운동장 가설무대에서 상연한, 변사(辯士)의 목소리를 곁들여 상연된 독립운동 영화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영화는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모세 이야기와 겹쳐졌을 때 일제식민지배와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불어닥친 좌우대립으로 우리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해방이 되었다는데, 자고 나면 어느 동리의 누가 죽창에 찔려 죽었다 하고, 서북청년단이 총을 메고 동네를 휘저으며 촌민들을 위협하고 면소를 향해 총질을 해댔다. 일제 때 대학을 나온 이웃동네 누구 아버지는 경찰서에 잡혀 갔다 와서 바깥출입을 삼가야 했고, 우리 동네 삼수 아버지는 해방 정국에서 한자리 할 정도로 시세에 밝은 분이었지만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보도연맹원. 그가 6.25 뒤까지 생명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6.25’가 터진 때는 13살 6학년 때다. 남녘에도 ‘사변’ 소식이 들렸으나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이승만의 성명만이 여론을 압도했다. 7월 중순, 우리 고장을 통과하는 철로에 흑인병사들과 탱크 등 중무기를 실은 화물열차를 볼 때까지만 해도 승리의 소식만 신나게 들었다. 그러나 방학 중반 어느 날 우리 동네 앞 큰 개울가에 미군이 포대를 쌓는 부산한 모습이 보였다. 그 날 나는 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의령방면으로 피난가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받았다. 피난 생활은 의령군․진양군․함안군 지역을 나다니며 9월 하순까지 계속되었다.

해방과 6.25는 이런 모습으로 어린 나에게 각인되었고 그래서 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큰 누님과 함께 3~4㎞ 떨어진 고향교회 새벽기도회에 가게 된 것이나,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도 어릴 때에 경험했던 민족문제와 관련있을 듯싶다. 그때부터 영글어진 민족․역사의식이 오늘의 민족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해방과 6.25를 계기로 미국은 한층 더 ‘은인의 나라’로 다가왔다. 해방과 함께 38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는 달리 미국은 신화를 만들 공간을 확장해 갔다. 미국 선교사를 통해 일찍부터 선교․의료․교육의 대상이었던 한국은 미 군정기 선교사 후예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이승만․김구․김규식․여운형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 그 중 여운형․김규식의 중도노선이 좌절된 것은 분단 상황 극복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 군정기부터 한국이 미국의 온실화로 자란 것은 아니었다. 해방 1년 뒤 미 군정은 “조선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 관찰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14%(1,189)가 자본주의, 70%(6,037)가 사회주의, 7%(574)가 공산주의를 찬성한다고 했다. 이 여론조사는 한반도에 미국식 자본주의 이식이 만만치 않겠음을 예고했다. 그러나 ‘6.25’는 결정적인 계기를 미국에 안겨 주었다. 미군 3만 6천여 명을 포함한 유엔군 6만여의 희생은 미국이 한국을 확실하게 자본주의 진영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1945년 해방 후 지금까지 몇 달을 제외하고는 한국은 전시작전권 등 군사주권을 미군에 위임한 채 행사하지 못했다. 이게 자주국가인가 하는 개탄은 이전에도 나왔다. 이렇게 군사주권까지 갖다 바친 한국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는 물론 ‘5.18’과 ‘한반도 비핵화’ 등 한국사의 결정적인 변곡점마다 미국의 기속(羈束)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이 휴전선 북쪽에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노골화한 북핵이 계기가 되었다. 핵문제가 인류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도, NPT 체제는 핵보유국의 기득권에는 아무런 통제를 가하지 못한다. 1990년대에 북핵이 문제되었을 때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북한과 미국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북한이 종래 사용하던 흑연감속 원자로를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약속은 2003년 1월 부시가 파기시켰고 북한은 NPT를 탈퇴했다. 양측에 책임이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제네바 합의에 기록된 북미간의 평화협정’을 미국이 거부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북한이 핵 문제를 고리로 북미간의 종전과 관계정상화(평화)를 추구했는데, 그것을 미국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트럼프-김정은이 싱가포르 선언에서도 같은 약속을 했지만 미국이 지키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미국이 제네바 합의 때와 싱가포르 선언 때에 북한과의 종전․관계정상화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6자회담 때도 북한이 냉각탑을 폭파하면서까지 비핵화를 약속했으나 미국은 다음 날 ‘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자금을 동결시킴으로 비핵화합의는 파기되었다. 여기서 미국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을까. 북한 핵을 존속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과의 종전이나 관계정상화(평화)는 미루겠다는 속셈 아닐까. 왜 그랬을까. 미국은 북한핵을 그냥 둔 채 관리하면서 한국에서의 현상유지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반대로 북한핵이 제거되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할 명분을 잃고 동북아 전략적 요충지에서 떠나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 아닐까.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미국제일주의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미국제일주의는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동맹국에서조차 극대화시키는 것에 귀착된다. 무역협정을 뒤엎고 동맹국의 방위비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설득은커녕 위하(威嚇)와 ‘아무말대잔치’로 일관한다. 트럼프의 미국제일주의는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동맹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방위비를 인상하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몇 번이나 겁박했고, 이런 겁박을 협상당사자가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트럼프 발언의 진정성 여부를 떠나 그의 철군 위협은 우리에게 기회로 역이용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입으로 미군철수를 거론할 형편이 못된다. 그랬다가는 무슨 난리가 일어날지 장담하지 못한다.

때문에 방위비를 올리지 않으면 미군철수를 단행하겠다는 트럼프의 엄포를 역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언불감청(言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리요’라고 한다. 이 때 셈법은 신중히 해야 한다. 미국을 향해서는, 철군했다가 다시 들어올 때는 공짜는 없으며, 제값내고 한국법 엄격히 준수해가면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편 미군철수로 북측과 한반도의 종전선언과 평화체제구축이 가능하게 된다면 북측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내놓도록 해야 한다. 종래 북한은 핵을 한반도의 종전선언․평화체제 구축과 맞바꾸겠다는 약속을 수차 해왔던 만큼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비핵화의 대가가 한반도의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이었던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렵겠지만 북핵 해결하고 미군 내보내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다음 단계가 열릴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평화통일연대 상임고문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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