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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에 돌아보는 언론·교계의 명암

기사승인 2020.05.18  11: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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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사에 있어서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언론의 자세처럼 치욕적이고 반언론적인 모습은 다시 없을 것이다.”

김삼웅은 저서 『곡필로 본 해방 50년』(1995, 한울)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의 관심이 온통 한국의 남쪽 도시 광주에 쏠려 있을 때 유독 이 나라 언론만이 침묵하거나 왜곡에 여념이 없었다”며 “언론의 침묵과 왜곡 속에서 소수 정치군인들의 사병화한 신군부가 많은 시민 학생을 학살하는 미증유의 만행을 자행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언론의 침묵과 왜곡 속에 광주사태는 ‘없었던 일’이었고, 이 나라는 ‘태평천하’였다고도 했다.

반면 외신들은 주재 특파원에다가 취재기자를 증원하면서까지 연일 광주사태를 대서특필했다. 1980년 5월, 당시 전세계가 알고 있던 광주에서의 만행을 정작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라오스·캄보디아보다 더한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을 고발한 외신들

“한국 남부의 대도시 광주에서 19일 오전에 일어난 반정부 가두 데모는 학생 외에 시민도 가담하여 약 1만 5천 명으로 불어나고 완전무장한 군대와 격렬하게 충돌했다.”(동경신문, 5월 20일자 ‘광주의 데모 폭동화, 군이 총검으로 진압’)

“무장 공수대가 발포를 계속했지만 이미 타오른 시위는 20일 밤, 그리고 이튿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20일의 충돌로 3명의 시위자와 4명의 경관을 포함하여 적어도 7명이 죽고 1백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 이날 아침 가두에서 시위군중과 군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충돌로 인해 상당수의 사상자가 나왔다.”(UPI통신, 5월 21일자 ‘무장군대, M16 난사’)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20년 전 4.19혁명 이래 그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정부, 군 당국과 학생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광주에는 22일 공수부대와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이 시 주변에 배치되어 ‘총공격’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아사히신문, 5월 23일자 ‘광주사태 긴장 계속, 군은 시 주변 완전 포위’)

“광주항쟁 4일째인 수요일, 최소한 24명이 사망하고 시민은 야만군대와 경찰을 추방하고 통제권을 장악했다. 수요일에 시작된 학생시위에 대하여 전두환이 지휘하는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 연행, 결단났으며 이로 인하여 항거는 도시 전체로 확산, 한국전쟁 이래 가장 거대한 봉기로 인하여 공수부대 출신이며 살해된 박정희의 맹신자인 전두환의 장래에 불안이 확대…”(뉴욕타임스, 5월 23일자 ‘광주 시민들, 군대와 경찰을 추방’)

당시 '광주사태'를 1면에 보도한 미국 뉴욕타임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능가한다.”(AFP, 5월 24일자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는 광주’)

 

북괴·김일성을 끌어들여 사태를 호도한 국내 언론

반면 국내 언론들은 광주사태를 보도하지 않거나 적극 왜곡하는 데 앞장섰다. 김삼웅의 설명이다. 조선일보는 5월 20일자 사설 ‘백척 간두에 서서’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면서 5.17조치의 부득이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북괴의 격증하는 적화책동이 학원소요를 고무 선동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조성하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으며 이와 같은 사태가 경제난까지 극도로 악화시켜 바야흐로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최규하 대통령은 지적하면서 이 국가적 위기를 위해 5.17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호소하고 나섰다.”

5·18 하루 전에 취해진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일명 5.17조치는 김대중에 의하면 쿠데타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청와대에서 한밤 치안 대책 회의를 열었다. 국무총리 신현확, 계엄사령관 이희성, 국방장관 주영복, 내무장관 김종환 등이 참석했다. 전두환은 신현확을 통해 비상계엄 확대를 위해 전국 지휘관 회의가 이튿날 열릴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두환은 권력장악에 나섰다. 5월 17일 전군 지휘관 회의를 거쳐 국방장관이 제출한 비상계엄 확대안은 밤 9시 50분에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를 이어받은 전두환의 5.17 쿠데타였다.”(『김대중 자서전1』, 2010, 삼인출판사, 400쪽)

조선일보는 5월 28일 ‘악몽을 씻고 일어서자’는 사설에서 계엄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두둔하고 있다. “광주사태를 진정시킨 군의 어려웠던 사정을 우리는 알고도 있다. 30년 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의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군, 국군은 광주시민을 포함한 온 국민의 아들이고 동생들이며, 그래서 국민의 국군이며, 국민으로 구성된 국가의 국군이다. 그러한 국군이 선량한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 지시했듯이 계속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의 군대로서의 사명을 다해 줄 것을 우리도 거듭 당부해 마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 3월 4일 그동안의 오류를 사과하고 바르게 잡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도 왜곡에 가담했다. 신문은 5월 29일자 취재기자 방담에서 “눈만 빠끔하게 나오게 하는 복면, 수건으로 입을 가린 사람 등등 정말 여러 모습이더군. 왜 그런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량배로 보이기도 했지. 특히 은행, 농협, 귀금속상 등이 가장 불안 속에 있었는데 다행히 사고는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아. 이날 아침 전남대병원에 들어온 시체 2구를 검안한 의사가 총기오발 사고로 숨진 것 같다고 하더군.”

김삼웅은 “광주항쟁 때 은행이나 귀금속상이 털린 곳은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도 5월 28일자 ‘광주사태의 수습단계’ 사설에서 “필시 서울의 학생데모와 광주사태를 바라보면서 김일성은 지금 대남정세 상황판 앞에 쭈그리고 앉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 무슨 결정적인 시기와 여건이 닥쳐왔다고 보면 불장난을 좀 하려들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앞서 조선일보와 마찬가지로 군사쿠데타에 대한 정당한 반대시위를 ‘북괴’, ‘김일성’을 내세워 대남적화통일의 빌미를 준다는 신군부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군부에 저항한 ‘언론인’들

그렇다고 국내의 모든 언론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를 순응한 것은 아니다. 김민환은 『한국 언론사』(1999, 나남출판)에서 1980년 5월 신군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저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80년 5월 들어 신군부의 언론 검열이 강화된 가운데 중앙일보와 합동통신, CBS, 국제신문 등의 기자들이 차례로 계엄 당국의 검열 철폐를 주장하고 나섰다. 기자협회는 5월 16일 회의를 열어 5월 20일부터 계엄 당국의 검열을 거부하며 검열 거부가 여의치 않으면 제작 거부를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들도 제작을 거부했다. 문화방송 기자들도 기사 송고와 제작 및 보도의 거부를 결의하고 동참했다. 합동통신과 조선일보, 동양통신의 기자들도 뒤를 따랐다. 경향신문의 기자들은 검열도 삭제된 부분을 공백으로 남긴 채 인쇄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취재, 기사 작성, 편집 등의 태업에 들어갔다. 이런 저항에 언론사와 신군부는 해직과 구속으로 대응했다. 전두환은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정권 장악에 나섰다.

1980년 7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 통신협회는 언론의 자율 정화를 결의했다. 곧 대대적인 언론인 숙정이 시작되었다. 형식은 자율 결의에 의한 것이지만 신군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8월까지 37개사 717명의 언론인이 해직되었다. 이 해 말,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고 언론기본법을 제정, 공포했다. 신군부의 문공부는 이른바 보도지침을 작성하여 언론사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전두환 축복과 반성 사이의 기독교계

그 달 6일 오전 7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는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려 1시간 30분 동안 지상파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대한뉴스 제 1294호-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 이 자리엔 한국교회의 지도자 28명이 참석해 전두환과 나라를 위해 축복 기도했다. 그 달 12일~15일 여의도에서는 150만 명이 참석했다는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10만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전두환은 그 달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해서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러한 광주의 희생 때문이었다. 1970년대 교계 운동은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이었다면 광주사태를 계기로 민족문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민주화도 어렵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이것은 8년 후인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 나오는 역사적·신학적 배경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선언의 초안 작성자로 참여했던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2010년 11월 한국기독교역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주최한 학술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서울에도 봄이 왔다고 기뻐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광주와 서울엔 오히려 겨울이 찾아왔다”며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결국 광주항쟁과 신군부 억압의 원인이 모두 분단체제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분단체제 극복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신군부의 등장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통일운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88선언은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면서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같은 피를 나눈 한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을 극복하여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 한국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임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일부 야당 의원들의 5.18 폄훼 논란이 있었지만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특별법 및 헌법 개정 등을 통해 이러한 논란도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 쿠데타와 광주 학살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한 적 없는 전두환도 단죄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와 함께 5.18 왜곡과 ‘전두환 찬양’에 앞장섰던 언론, 기독교계의 반성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5·18 40주년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이지 않을까.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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