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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寄生蟲)이 아닌 기생충(祈生忠)이 되자

기사승인 2020.02.10  13: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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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기생충’ 각본을 쓴 봉준호 감독과 한진원 작가는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올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와 계급갈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다뤄 미국 작가조합 각본상과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에서도 외국어영화상과 함께 각본상을 탔다.

기생충(寄生蟲)이란 말은 사전에서 ①다른 동물(動物) 체내(體內)의 양분(養分)을 흡수(吸收)하여 사는 벌레 ②남에게 의지(依支)하여 사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화 기생충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시사성은, 내 이웃이 내 형제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배려와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 잘 살려고 하는 이기심과 이기적 사고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이 한편의 영화는 우리에게 큰 울림과 함께 메시지를 주고 있다. 내 이웃이 불행해지면 나 또한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뒤돌아봐야 한다.

내 가족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이웃도 내 형제요, 내 부모만 부모가 아니고 이웃의 부모도 내 부모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고, 나뿐만 아니라 내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이 영화는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태어난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 알 때까지 찾고 또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온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나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선각자들의 외침을 이제는 좀더 깊게 깊게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거짓 나인 제나(몸나, 獸性)를 죽이고 참나(靈我, 眞我)를 발견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祈生忠(기생충)이 되어야 한다.

기생충(祈生忠)은 기도(祈禱)하고 영원한 생명(生命)인 永生을 얻기 위해 충서(忠恕)하는 사람이다.

충(忠)은 하나님께 해야 하고 서(恕)는 이웃들에게 해야 한다.

충(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서(恕)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충서(忠恕)는 孔子의 尊重과 配慮의 思想이다.

공자는 강의가 끝나갈 무렵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일생을 두고 깨닫고 추구한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다(吾道一以貫之)”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였고, 이에 증삼은 한 순간의 지체함도 없이 “예 선생님(曾子曰唯)”이라 대답을 하고 이어 공자는 방문을 나선다.

이에 대하여 여러 제자들은 도무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받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의아해 하자 증삼은 말한다. “우리 선생님이신 공자께서 일생을 두고 깨닫고 추구하신 것은 충(忠)과 서(恕)라는 의미란다(夫子之道忠與恕)”라고.

공자(孔子)의 제자 증자(曾子)는 스승님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 말하고 있다.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이니 ‘마음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충(忠)이라는 글자는 가운데 중(中)과 마음심(心)자가 합성된 글자이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다. 공평하다. 정성스럽다. 충성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는 글자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공평함이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精誠(정성)을 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께 忠誠할 수 있는 것이다.

서(恕)란 같은 마음을 의미한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이니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이지만 단순히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다. 서(恕) 자는 ‘남의 처지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다. 용서하다’는 의미로 사람의 마음이란 다른 부분보다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의미가 된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아 진실한 마음(忠)을 가질 때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진다. 진정한 공감은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공자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이 두 글자의 의미로부터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비슷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공평함이 최고의 가치라는 보편자를 이끌어 내고 이를 일생 동안 실천함으로써 급기야 만세의 사표가 된 것이다.

존중(尊重)과 배려(配慮)란 별개의 말이 아니며, 아울러 상대방을 위하는 이타(利他) 또한 아니다. 이 말의 근본을 되짚어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또한 좋아하며,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 또한 싫어한다는 것에서 지나지 않으므로 가능하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베풀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베풀지 않아, 어떤 경우에서도 남 대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며 타인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돌려 생각하면서 공평무사하게 사람을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己所不欲勿施於人). 만일 공자의 충서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사회는 존중과 배려로 넘쳐날 것은 분명하다.

예수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더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진정한 祈生忠이 됩시다.

柏道(백도) 林采永 쓰다.

임채영 stova@naver.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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