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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에너지 분야에서 냉전이 미친 영향

기사승인 2020.02.07  20: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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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의 유산인 ‘분단’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에게 ‘냉전’은 참 익숙한 단어다. 하지만 냉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선 얼만큼 알까?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냉전의 과학, 기술 그리고 체제’란 주제로 냉전사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와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최하고 한국냉전학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한국, 미국, 소련의 사례를 중심으로 과학기술과 에너지 분야에서 냉전이 미친 영향과 접경지역과 분단 전시 시설을 통해 한반도에서 분단이 기억되고 기록되는 양상을 고찰했다.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냉전의 과학, 기술 그리고 체제’란 주제로 냉전사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번 행사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와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최하고 한국냉전학회가 주관했다. ©유코리아뉴스

이날 김성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한국의 핵기술이 냉전을 거쳐 어떻게 사회기술시스템으로 자리잡게 됐는지 살폈다. 김 연구관은 “6.25 전쟁 이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1950년대 원자력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미국의 기술 지원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핵무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2차대전 당시 원폭 투하에 대한 비판적 세계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미국이 ‘평화를 위한 원자’를 제창하며 주변 국가에 핵분열 물질의 평화적 활용과 관련 기술을 원조하던 상황과 핵무기를 보유하고 싶었던 한국 정부의 기대가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것. 

그렇게 우리나라엔 1959년 대통령 직속 정부 부처로서 원자력원이 처음 설립됐다. 초창기 원자력 사업은 과학기술 일반을 위한 연구로 시작됐으나, 몇 해 지나지 않아 이내 핵에 관한 지식 생산 체계를 갖춰졌다. 미국의 지원으로 연구용 원자로가 도입되자 원자력 사업은 더 활기를 띠었다. 이후 원자력 사업에 부침이 있긴 했지만, 60년대 말엔 핵의 ‘전략적’ 활용을 위해 핵연료 시설의 도입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우리나라의 전략적 핵 활용 연구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한국 정부는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로부터 들여오려던 핵 시설을 포기해야 했다. 다만 원자력 발전 사업은 본격화됐다. 김 연구관은 “‘할 수 있는 사업’과 ‘할 수 없는 사업’이 분명히 나뉨으로써 사회기술시스템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한국 원자력 사업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연구관은 여전히 핵 기술의 군사적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핵은 군사적으로 활용 가능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군사적으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군사적 활용과 발전 분야 활용이 긴밀히 협의해야 하지 않을까. 일국적 분석을 넘어 국제적 범위에서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하 서울대 교수는 ‘석유, 달러, 그리고 소련의 붕괴’란 제목으로 냉전 시기 크게 바뀐 국제 질서를 살폈다. 이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중심의 국제 질서를 두 개의 거대한 산유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의 대결로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과거 패권 국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패권을 유지 및 재생산했던 기축통화 보유국 미국을 승자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여기서 다른 방식이라 함은 미국이 일본뿐 아니라 서유럽의 주요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시킨 것을 일컫는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은 일본과 서유럽의 석유 수요를 늘리고, 수에즈 운하와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주요 수송로를 확보했다. 전후 유럽 복구를 위해 지원한 마셜플랜 자금은 정유 공장을 건설하고 산업용 석유 보일러를 설치하는 등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을 위한 인프라 건설에 지출되었고, 마셜플랜 기금도 10% 이상 미국 기업으로부터 직접 석유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석유가 언제까지나 넘쳐날 순 없었다. 70년대부터 석유 생산이 한계에 달하자, 미국은 달러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석유를 달러로 결제하고,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오일머니를 달러 자산에 투자하게끔 한 것이다. 이후 고정환율제도 변동환율제로 바뀌었다.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보유한 미국은 환율 변동을 통해 산유국을 통제할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가 소련이었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소련은 세계 1위 산유국으로서 많은 달러를 확보했지만, 1985년 유가와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이중고를 겪게 되고 결국 붕괴를 맞았다”면서, “금본위제에서 달러본위제로 전환되고, 소련도 달러와 같은 경화가 필요한 상황에선 냉전의 승패가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밝혔다. 

조원선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냉전기 미국의 중동정치를 에너지 안보 관점에서 분석했다. 조 교수는 “70년대부터 중동에 냉전의 매커니즘 유입되면서, 석유가 에너지 영역에서 안보 영역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중동 지역 국가들이 석유를 통해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친 이스라엘 정책을 변화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다. 이러한 중동 국가들의 석유 정치는 미국의 에너지 정책과 외교 안보 정책을 동시에 바꿔놨다. 에너지 수급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외교 안보에 있어 중동을 중요하게 인식하게 시작했다. 

조 교수는 “1973년 닉슨 미 대통령은 오일 무기를 공식 무기로 선언하고, 에너지 비상대책단을 진두지휘하며 전시 태세와 같은 작업을 진행했다”며, 동시에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제적 이익과 이스라엘 관계에서만 집중하던 중동 정책을 냉전의 연장선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정책 기조로 변경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아시아 국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도 덧붙였다.

한편, 주최측은 오는 25일 오전 9시 30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평화관 대회의실에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형성’을 주제로 냉전사 워크숍 3세션을 이어갈 예정이다. 

정지연 기자 ukoreanews@gmail.com

<저작권자 © 유코리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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