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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갈등 해법, 당대의 ‘통일 욕심’을 내려놓는 데서

기사승인 2019.12.03  17: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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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남남갈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⑤

‘남남갈등’이란 남한 내의 일반적인 사회 갈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 가치를 채택하고 있는 사회는 의견의 다양성에 따른 갈등과 조정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창조적인 사회적 갈등은 민주 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남남갈등’은 남한과 북한의 특수한 이중적 관계(적이자 동시에 동포)를 둘러싼 남한 사회 내부의 갈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는 남한 사회가 북한을 바라보는 대북관과 남북한 관계와 통일의 문제를 바라보는 통일론의 차이가 다양한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계층, 세대, 지역의 층이로 확대 심화되는 갈등의 과정을 총칭해서 ‘남남갈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남갈등’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대북포용정책으로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획기적인 남북관계의 변화를 가져왔던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정부 때이다. 당시 “남북갈등보다 남남갈등 더 심각(조선일보, 2000. 7. 13.)”이라는 언론보도를 통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이룬 진보 정권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적 논조로 ‘남남갈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는 측면에서 어떤 이들은 ‘남남갈등’이 실체보다 정치적으로 가공되고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언론의 책임에 대해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언론의 정치적 과장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곧 ‘남남갈등’의 사회적 실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이후 국민의정부가 이룩해 놓은 남북 관계의 발전을 토대로 10.4 남북정상선언을 이룬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남남갈등’은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양분된 이념적 진영논리를 통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어진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을 지나면서 ‘남남갈등’은 토론과 대화의 이성적 수준을 넘어서 감정적 대립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되어 오고 있다. 최근 우리는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나뉜 보수와 진보의 대규모 시위 집회가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혹은 세대 사이의 힘겨루기와 세력 대결 양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묻지마’식 반대를 위한 감정적 대립으로 격화되고 있는 ‘남남갈등’의 수준은 대화 자체가 불가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민족 반역 세력’과 ‘종북 좌파 척결’이라고 부르며 섬멸,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 미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문제이다.

‘남남갈등’의 원인은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남북 분단 체제와 한반도 적대 갈등구조에 있다. 더욱이 1987년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오랜 시간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을 경험하면서 반공과 멸공으로 대변되는 냉전 문화와 분단 체제를 내면화시킴으로써 다름과 갈등 자체에 대처하는 사회적 능력과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회적 인내 경험이 현저히 부족하다.

‘남남갈등’에 대한 연구와 원인 분석,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남남갈등’은 해소되거나 완화되지 않고 오히려 고착되어 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남북한 통일 논의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민족이 분단되었는데 통일 논의에만 집중했다니, 그렇다면 민족의 통일을 포기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내 시대에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성급한 욕망을 내려놓자는 것이다. 대신 남북한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를 이루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통일에서 평화로의 화두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갈등과 한국 전쟁으로 서로를 죽여야 했던 분단의 증오와 적대의 경험이 몇 해만 지나면 70년이나 된다. 분단으로 살아온 세월이 더 익숙한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더욱이 남한이 북한과 통일을 이루자고 하면 분단이 가져온 죽음의 트라우마를 제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세대와도 우리는 공존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 사회주의 정권에 자신의 가족과 전 재산을 빼앗기고 혈혈단신 남한으로 피난 오게 된 상실의 경험이 피해의식과 복수의 감정으로 남아 심리적 트라우마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세대를 이어서 전승되고 있다. 민족의 화해와 용서를 말하기에는 통일 담론의 그릇이 버겁다. 남북한 통일문제만 나오면 ‘남남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인 셈이다.

그동안 우리는 남북한 통일에 관한 남북 정권 차원의 합의안도 이미 여럿 가지고 있다. 마치 통일만 되면 한반도의 평화는 완성되는 것처럼, 통일을 평화의 핵심이자 결과로 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이다. 한반도의 평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 담론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남북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은 평화를 이루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여전히 남북한이 휴전선을 기점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중인 상태에서 한반도 평화 담론의 목적을 섣불리 남북한 통일에 두었을 때, 우리는 체제 경쟁과 이념적 주도권 등의 소모적인 논쟁에 함몰되는 ‘남남갈등’에 휩쓸리게 되는 것을 경험해 왔을 뿐이다. 통일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나 최소한의 합의가 우리 사회에서 정립되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상적·규범적 목표로서의 통일인지, 실천적 목표로서의 통일인지, 법적·제도적 통일인지, 사실상의 통일인지, 과도기적 통일, 혹은 흡수 통일과 급변상황에 의한 통일인지, 다양한 상황과 조건을 전제로 한 통일 개념이 혼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통일을 논할 때 오히려 ‘남남갈등’이 심화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오랜 시간 분단체제에 익숙해진 남한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의식 변화도 통일 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V) (2018.12.)”에 따르면, 남북한 통일과 관련해 남한 국민들은 ‘통일문제와 경제문제 중 하나를 골라서 해결해야 한다면 경제문제를 선택하겠다’는 진술에 77.1%가 동의했고, ‘남북한이 한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55.9%가 동의한다고 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조금 못살아도 된다’는 데 동의하는 의견은 17.12%에 불과했지만 반대하는 의견은 53.24%에 달했다. 남북한 통일문제를 경제적 관점으로만 단순 비교하는 문항 가치 오류라는 비판을 감안한다고 해도, 통일에 대한 남한 국민들의 의견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한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낭만적 당위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통일 논의가 지속될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설령 남북한이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한반도 평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요건들이 동북아 평화로 수렴되지 않는 이상 남북한의 통일은 한반도 평화의 상수 조건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통일보다 평화를 우선적으로 고민하며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북한에 비자를 받아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공존 수준의 평화를 일구어 가는 일에 진력하는 것이다. 통일은 평화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에 다음 어느 세대가 이루어갈 자연스러운 역사의 과정으로 맡겨두자는 것이다.

평화는 다양성의 존중이며 공존이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대화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사회적 인내 경험이 바로 평화의 실행이다. 분단의 장벽이 반(反)평화적인 이유는 적대와 갈등, 대립의 일상적 관계가 다양성의 존중을 막고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획일화시킴으로 공존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분단의 적대 구조를 공존의 평화 구조로 바꾸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남한 사회 내부를 평화의 구조로 전환시켜야 한다. 다양한 가치의 세심한 고려와 상대에 대한 존중을 위한 공동체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곧 평화를 일구어 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그 다름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평화다. 이미 다원화된 남한 사회의 가치와도 부합하는 것이 바로 평화다. 통일은 평화의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통일에 대한 당대의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 평화의 가치를 습득하고 훈련하고 살아내는 것에 집중할 때, 우리는 남남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김영식/ 낮은예수마을교회 목사

김영식 youngsik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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